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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㊳ 임진강 6.15사과원 농부

입력 : 2016-06-22 16:03:00
수정 : 0000-00-00 00:00:00

‘통일사과’ 키우는 농부

 

 

민통선안 [임진강 6.15 사과원]을 가는 길은 역시나 쉽지 않다. 통일대교 검문소에서 군인이 나와 안내한다. 안에서 마중나올 때까지 검문소 초입으로 다시 돌아가서 기다리란다.

 

6월의 찐한 햇살 아래서 20여분 쯤을 기다리니, 전환식씨가 나왔다. 검문소에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쫓아간다. 통일대교 아래로 흐르는 임진강은 진한 회색빛 갯벌을 자랑하며 평화롭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JSA부대가 보일 즈음 오른쪽으로 돌아 가고, 가고, 또 가니 왼편에 과수원이 있다. 트럭 반대편 과수원 한 편 공터에 차를 대니 큰 개들이 왕왕왕 짖는다. “제 새끼들 노는데라고, 다칠까 봐 짖는거야.” 그러고 보니 손바닥보다 조금 큰 강아지들이 바글바글 모인다. 13마리. 아랫집 어미가 철망 안에 있어서, 그 집 새끼들 5마리까지 여기 와서 젖을 먹고 논단다. 그래도 이 집 암컷은 내치지 않고 13마리 모두에게 젖을 주고 돌본다고... 참으로 기특한 녀석일세.

 

 

“파주의 사과 농사는 역사가 있어”

전환식(1950년생)씨가 사과농사를 시작한 것은 2003년이다.

 

파주의 사과 농사 역사는 오래되었다. 지구 온난화로 사과 생산지가 북상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사과는 한냉과일이라, 예전에도 파주에 사과 생산지가 있었다고 한다. 올 5월에 돌아가신 문산 이천리의 한영철(82세)씨 밭에는 70년된 사과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 민통선 안에서 배농사를 짓는 전재규(82세)씨도 월롱에서 사과밭을 했었고, 여기 민통선 안 JSA인근에도 사과밭이 있었다 한다.

 

“6.15사과원은 ‘분단에서 통일로’가자는 뜻”

 

“언론에서 잘못 알아서 그렇지, 북한의 사과 생산량이 남한 생산량보다 더 많아.”(위키 백과에 의하면 북한은 635,000톤, 세계 18위 생산국이고, 대한민국은 470,865톤으로 세계 25위 생산국이다. 2008년 기준)

 

전환식씨는 사과농사를 뜻하지 않게 시작하게 되었다.

 

파주시에서 3,000평짜리 시범 사업을 따왔어. 어떤 농부가 이 사업 한다고 기반 조성하고, 묘목 계약까지 다 했는데, 땅주인인 종중에서 과수나무를 심으면 안된다고 해서 못하게 됐지. 예산까지 받았는데 할 사람이 없어서 시에서 난리났지. 나보고 사과농사 지으라고 하도 졸라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하게 된거야.”

 

사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터라, 사과 재배를 배우려고 기차타고 동대구 가서, 다시 군위면으로 사과시험장 찾아가서 배웠다. 지금은 사과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때 만난 사람들이 ‘사과공부방 1기’로 지금도 1년에 몇 번씩 만나 어울려 다니고 있다한다.

 

  
 

농장 이름 <임진강 6.15사과원>

“임진강은 파주지역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분단을 상징하기도 해. DMZ나 민통선 같은 걸 이름에 넣는 게 많은데 분단을 팔아먹는 것 같아서 나는 꺼려지더라고. 그래서 고민하다가 ‘6.15 남북 공동선언’은 평화이고 통일이니까 6.15를 땄지. 그러니 <임진강 6.15 사과원>은 ‘분단에서 통일로’라는 의미야.”

 

이 이름 덕인지, 매년 6.15행사가 있을 때, 6.15합창단이 과수원에 들르고, 통일운동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종종 온다한다. 「낙성대 만남의 집」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도 매년 오셔서 사과도 따고.

 

2009년에 6.15북측위원회에서 남측위원들을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전환식씨도 남측위원의 일원으로 50명과 함께 고려민항을 타고 평양에서 4박5일 여행을 했다. 만찬에서 남쪽 2명, 북쪽 1명씩 원탁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때 북측 젊은 친구가 전환식씨 이름표 보고 물었다. “6.15사과원이 그 사과원입네까?”하고. 인터넷에서 봤단다. 노인들 와서 사과 따고 하는 것을. 그러니, <임진강 6.15사과원>은 남북 모두에 유명한 사과밭인 셈이다.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려면 통일대교 검문소에서    기다려야 한다.
 

건설회사 직원에서 농부로 변신

<임진강 6.15사과원> 농부 전환식씨는 1950년생이다. 전쟁통에 태어났다. “어머니가 을지로 6가에서 쌀을 구하러 수원까지 갔대. 걸어서. 쌀을 이고 오다가 남태령 어느 집 마굿간에서 나를 낳았다는 거야. 예수처럼.” 마굿간에서 낳았다고, 자신을 예수에 비유하면서 크게 웃는다. 아버지 따라서 영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10살 무렵에 파주에 와서 금곡리에 살았다. 72년에 남광토건에 입사하고, 이후 대우개발로 옮겼다가 84년에 사표를 쓰고 농사지으려 귀향했다.

 

파주에 와서 소를 키우려 했다. 84년 당시 대통령 동생 전경환씨가 새마을운동중앙회장으로 호주의 흰 비육소를 수입하여 보급했다. 토종 송아지값보다 싸게 분양하니까, 분양 받으면 돈이 될거라 생각해서 잘 팔려나갔다. 그런데 수입소가 잘 죽었다. 그래서 “병든 소 수입해서 죽는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사실은 호주에서 농가까지 옮기는데 한 달 걸리는데, 관리가 잘 안되어 많이 죽어나간 것이다. 죽지 않아 잘 키운 소들도 출하할 때 가격이 폭락해서 더 망했다.

 

이 즈음이었다. 서삼릉에 있는 가축개량사업소에 3개월 교육받아 가축인공수정사면허를 받았다. 그리고 법원읍 가축약품 파는 가게에 간판을 달았다가, 1주일도 안돼서 내려버렸다. 당시 가축약품을 판매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수의사가 아니었다. 인공수정사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 수의사가 아닌 사람과 같이 하는 것이 문제 있다고 생각해서 미련없이 정리해버렸다. 그리고 부인은 금촌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자신은 민통선 안에 들어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민들 돈 번다는 것 복권 맞기 보다 어려워

“우리나라에서 농사 지어서 돈 번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야. 복권 맞는 것보다 어려운 거야. 생각해 봐. 풍년 들면 가격 떨어져서 제 값 못받아, 흉년 들면 팔 게 없어 적자. 나만 풍년들고, 남들은 흉년 들어야 내가 돈을 벌 수 있지. 그러니 복권 맞는 것보다 어렵지. 어떻게 나만 풍년 드냐고?”

 

그는 30년 넘게 농사를 지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깊어졌다. 외국의 여러 나라 농업정책이나 통계를 보면서 ‘농업인이 편하고 안정되어야 국가가 편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스위스처럼 소를 한 마리 길러도 멋있고 여유롭게 기르는 것을 꿈꾸고, 우리나라 농부들에게 그리 하라고 하는데... 우리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빚만 느는데...어떻게 도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을 수 있겠어?”

 

그 동안 나라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잘 산다고 가르쳐왔다. 교육도 온통 그렇다. 그래서 정부의 보조사업에 대해 “공짜를 바라느니”, “보조금 바라며 농사를 짓는다”느니 하는 인식이 있다.

 

“공무원이나 군인은 제 몸 하나 갖고 일하며, 월급 받고 자식 키우고 잘 살고 있잖아. 더구나 농부들은 제 몸으로 제 땅에서 농사 지어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농부들이 공무원이나 군인보다 더 큰 일 하는 것이지. 그런데 왜 보조금을 받는 것을 이상한 일처럼 생각하냐고?”

 

덴마크나 스위스는 농업국가이다. 그런데 그 나라는 농사지을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6개월밖 에 안된다. 그런데도 농업강국인 이유는 나라가 농업인에게 직접 보조를 해주고, 생산 이외의 부분에 대해 다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마트에 가면 덴마크 돼지고기가 수입되어 판매되고 있다. 그 싼 가격에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농업예산의 50%를 농업인에게 직접 주겠다는 공약’

공무원과 군인이 나라를 위해 일하기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듯이, 국민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주는 농민들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일임에 틀림없다. 농민들이 없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몇 해 전에 무슨 통계를 봤는데, 미국 농민의 농업소득중 42%가 직접 보조금이야. 유럽연합(EU)이 40%정도 되고. EU는 앞으로 농업예산의 70%를 농업인에게 직접 보조금으로 주기로 했다고 합의했다는 뉴스를 봤어.”

 

농민들이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고 진단했다. 그동안 정부에서 해오던 농업보조금이나 지원을 농민에게 직접 주라는 것이다. 지금 쌀직불금, 밭직불금제도 말고는 모두 업자에게 보조금이나 지원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선진 농업국처럼 직접보조금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다.

 

“사과농사를 지으면서 지원을 받는데, 맞춤형 영농사업이라고 50%를 지원해주고, 50%를 자부담하는 거야. 실제로 농민이 덕보는 것은 10%가 안될 수 있어. 정부사업이니까 모두 영수증 처리해야해. 그런데, 농민이 직접 필요한 것을 사서 쓴다면, 과수원에 필요한 지지대, 이런 파이프를 중고품 사다 써도 아무 문제 없잖아. 그런데 영수증 처리가 안되니 꼭 새 거 사다 써야해. 묘목도 필요하다면, 미리 한 해전에 심어뒀다 쓰면 되잖아. 그러면 묘목값 얼마 안되잖아. 그런데, 영수처리를 해야하니까 묘목 한 주에 비싼 것은 19,000원, 보통은 15,000원하는 걸 사야해. 그러니 보조사업이 농가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안돼.”

 

그래서 전환식씨는 전국에서 유일한 농민 비례대표인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의 공약에 기대한다. 그는 “농업예산의 50%를 농업인에게 직접 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김현권의원도 경북 의성에서 한우를 키우는 농민이기에 전환식씨와 같은 의견인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인다. “누리과정 지원금 문제도 그래. 국가가 애당초 잘못된 것이야. 왜 누리과정 예산을 어린이집이니 하는 업자에게 주냐고? 엄마한테 줘서, 엄마가 어린이집 보내든, 집에서 키우든 하게 해야지. 농업예산도 똑같아.” 농업인 직불금을 누리과정에 비유하니, 정말 확연이 다가왔다.

 

▲' 6.15원'  6.15.

 

“내 인생의 좌우명은 통일이야”

“지금 여기도 농사 짓는 사람중 땅 팔리면 농사 짓겠다고 남을 사람이 없어.” 정말이지 농민이 설 자리가 없다. 아니, 땅값 오르는 것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고, 언제라도 그만 두어야할 일로 치부되고 있다. 그만큼 힘들면서도, 사회에서 그만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새도 대남방송, 대북방송이 나오는지 물었다. 지난 3월 새벽에 찾은 임진각에서는 전쟁이 날 듯 날 선 목소리의 대남방송이 왕왕 대고 있었다. 지금은 소리가 작아졌지만... 옆에 있던 농부의 한마디. “소리가 나긴 하지만 알아듣지 못해요.” 전환식씨 한마디. “북쪽이 남쪽보다 몇 배 더 해.” 부인의 한마디. “대성동에서는 잠을 못잔대.”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숨쉬는 공기마저도 잡음을 실어 나르게 되고, 잠자는 일마저 쉽지 않을 일이 된다. 도대체 이 반복과 증오는 언제면 그칠 것인가?

대북관계, 미국 문제, 필리핀 해군기지와 공군기지 철수 문제, 우리 역사 이야기, 백두산 등정이야기 등등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손과 발로 인생철학을 쌓아온 농부의 굵은 심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좌우명? 통일염원이야.”라신다. “낙성대에 살고 계신 장기수 노인들은 한 평생 한가지 일념으로 살고계셔. 지금도 한반도 깃발을 배낭에 매고 등산을 하시는데...존경스럽지. 지금 여기...여기에 개성공단 가는 차 한 대도 안다니잖아. 그런데 관광버스는 계속 다니잖아. 제 민족끼리 총부리 겨누고도,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돈벌이하잖아.” 그는 개성공단이 폐쇄된 자리에 분단 상품만 팔리는 현실을 애통해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통일 정책을 높이 샀다.

 

“우리 민족이 운이 없어. 부시가 아니라 고어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남북 대화가 이루어졌을 텐데. 김대중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도라산역에 데리고 왔잖아. 철도 침목에 부시 서명이 있어. 미국에서 아무리 반대해도 우리는 뚫고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어.”

 

<임진강 6.15사과원>. ‘분단을 넘어 통일로’가는 염원으로 사과 농사를 짓는 전환식씨의 염원에 내 소원을 덧붙여 본다. “우리 손주들이랑 파주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베를린 가야지”

 

 

 

글 · 사진 임현주 기자

 

 

 

#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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