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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⑨ 니 로 샨 (34세) 스리랑카 파주공동체 대표

입력 : 2015-02-23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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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로 샨 (34세) 스리랑카 파주공동체 대표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



“비노디가 보고싶어요” - 스리랑카 파주공동체 대표 니로샨



 



경기도의 외국인 주민은 2014년 현재 50만명(492,790명)이다. 그중 외국인 노동자가 40%인 20만(201,691)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 외국 국적 동포(16.4%), 외국인 주민 자녀(10.5%), 결혼이민자(8.4%) 등의 순이다. 



우리 파주에는 총 13,105명의 외국인 주민이 살고 있다. 이중 파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5,951명(미등록 노동자 제외)이다. 



이 가운데 비전문취업비자(E-9 비자)로 들어와서 파주에서 일하고 있는 스리랑카 사람들은 300명이 넘는다(전국 25,000여명). 이들은 공동체를 만들어 외국에 와서 겪는 어려움을 서로 나누고 도와주며 지내고 있다. 



거주지마다 공동체를 형성하여(경기북부의 경우 포천 의정부 마석 파주 등) 서로 돕고 격려하므로 적응도 잘하고, 협력도 잘 되는 편이다. 



우리나라 명절 설을 맞이하여 더욱 더 고향을 그리워 할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자, 파주스리랑카공동체 대표 니로샨씨(34세)를 만났다.  



 



“한국에 온 지 6년 넘었어요.”





니로샨씨는 한국에 온 지 6년이 되었다. 통상 ‘E-9 비자’는 3년 체류를 기본으로 한다. 기업주가 연장을 원할 경우 1년 10개월을 연장해주므로,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가 최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4년 10개월이다. 그런데 성실근로자가 되면 다시 한번 비자(second visa)를 받을 수 있어 총 9년 8개월을 한국에서 일 할 수 있다. 니로샨씨는 성실성과 책임감을 인정 받아 첫 번째 기한을 채운 후, 다시 한 번 한국에 들어와 6년째 일하고 있다. 흔치 않는 경우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한국에서 일하며 살고 있지만 가족을 초청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이주노동자의 가족 동반을 허락하고 있지 않다. 



 



‘E-9 비자’ 니로샨의 꿈



그는  ‘한국 스리랑카 공동 운영 직업전문학교’에서 전기 기술을 배우며, 한국말도 같이 배웠다. 고향에 어머니와 남동생 둘을 두고 한국으로 왔다. ‘E-9 비자’로 한국에 들어와서 2년 반 일하다가 고향에 가서 사랑하는 애인과 결혼을 하고 돌아왔고, 작년에는 2살 된 딸아이를 보러 고향에 다녀왔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니 핸드폰을 꺼내 아기와 부인 사진을 보여준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기가 함박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기가 예쁘다는 칭찬에 그의 얼굴에 행복 꽃이 피어난다. 한국에 와서 번 돈의 80%를 고향으로 송금하며 꿈을 키운다고 했다. 그의 꿈은 여행사를 차리는 것이다. 



“여기서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같이 회사를 만들고, 한국 사람들에게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가이드도 하고.... 제 꿈이 그거예요.”  그는 현재 한국어 2급 자격증을 받았고 3급을 준비중이다. 



 



스리랑카 설날은 4월 안산에서 알룻아우르뜨 축제 열려 





“설이나 결혼식 같은 가족 행사에 같이 못하는 게 가장 슬퍼요. 사진으로만 보고... 스리랑카에서는 설날 부모님께 옷을 선물하는데 못하고 아내도 외로와서 힘들어하고, 저도 혼자 있어서 슬퍼요.”  



며칠이면 우리나라 대명절 설날이다. 니로샨씨에게도 힘든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스리랑카는 설날이 우리와 다르다. 스리랑카 전통력에 의해 설을 쇠기 때문에 4월 12, 13, 14일경이 설날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부터 스리랑카 이주민의 전통 설날 축제(알룻아우르뜨 축제)가 매해 4월 안산에서 열려왔다. 올해로 18회가 된다. 매년 3,000~4,000명 정도의 스리랑카 이주민들이 모이는 거대한 축제이다. 우리 옆에 이렇게 오래된 아시아 친구들의 축제가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거다.  



연휴가 긴 한국 설날 동안 그는 고향 친구들을 만날 계획이라고 했다. 니로샨씨처럼 한국에 일하러 들어와 있는 어릴 적 같이 놀던 고향 친구를 만나러 울산이나 부산으로 갈 계획이다. 타국이지만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진한 고향 냄새를 맡게 될 터이다.  



 



“매일 가족하고 채팅하는데... 그 시간도 없을 때 너무 슬퍼요”



그에게 한국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을 물었더니, 쉴 시간 없이 일할 때라고 답했다. “밤 10시, 12시까지 일할 때 너무 힘들어요. 매일 와이프하고 딸하고 30분씩 채팅하는데. 그 시간도 없어서 너무 슬퍼요.” 비록 돈을 벌러 오긴 했지만 휴일도 없이 늦은 시간까지 일 할 때면 몸도 너무 힘들고, 가족의 목소리조차 들을수 없으니 마음도 힘들다. 작년 말에는 회사가 무척 바빠서 한국어 수업은 들을 엄두도 못냈다.     



‘성공회 파주이주노동자센터 샬롬의 집’ 사무국장 한은숙씨가 거든다. “배울 기회를 안 주면 우리 사회도 손해예요.” 한국어를 익히면 한국사회에 적응도 빠르고, 일 하는데 필요한 의사소통이 잘 되어서 일도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안주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니로샨씨는 용접기술자이다. 5년 동안 용접일을 하면서 이제 반장이 되었다. 9명의 스리랑카 노동자와 함께 일하고 있는데, 반장이라는 책임이 있어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많다고 했다. 오래되니 동료인 한국 사람들과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다.



 



“지금 제가 와이프보다도 요리 더 잘해요.”







타향살이 외국살이에 먹는 것은 어떻게 해결할까? 니로샨은 기숙사 안 식당에서 밥을 따로 해 먹는다. 니로샨은 자신이 일하는 회사가 고맙다고 했다. 어떤 사업장의 경우에는 전기요금 등을 포함해서 기숙사비를 받기도 하고 식대를 제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사업장은 노동자들이 직접 장을 보면 회사에서 식비를 제공한다. 주로 닭고기나 생선 등을 넣고, 야채와 향료를 넣어 끓이는 ‘커리’를 해먹는다.  원래 스리랑카에서는 여자들만 음식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 남자들도 요리를 한다. “오늘 저녁하면 내일 점심까지 먹어요. 9명이 2명씩 돌아가면서 식사당번을 해요. 지금은 제가 와이프보다도 요리 더 잘 할거예요.” 



한국 음식중 제일 좋아하는 것을 물었더니, ‘삼겹살’이란다. 김치도 좋아하는데, ‘안좋은 김치’도 있다 한다. “파김치, 갓김치 같은 거냐”했더니 고개를 끄덕여 모두 웃었다.  



 



고국의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모금 



스리랑카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한국에 처음 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한국말이 서투니 아파도 의사에게 이야기를 못하거나, 의사소통이 안되서 회사와 문제가 생겼을 때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중점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1년에 2~3번 모두가 모여 송년회나 추도식 등을 한다. 이번 설(4월)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설 축제를 열 계획이다. 



그리고 스리랑카를 돕기 위한 모금을 한 후 본국으로 보내기도 한다. 최저임금, 근속년수가 늘어도 호봉이 오르지 않는 불합리한 조건속에서 야간, 휴일 근무를 해서 받은 소중한 돈의 일부를 고국의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 그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일었다.    



스리랑카의 역사는 2천년이 넘는다. 대통령을 6년마다 뽑고, 모든 교육은 무료이다. 정말 공부할 아이들만 대학에 가고(고교생의 10%정도만 진학) 싱할라어와 타밀어를 공용어로 쓴다. 그간 싱할러족과 타밀족이 26년간의 분쟁을 끝내고, 지금은 평화롭게 지낸다고 했다. 같은 아시아에 살면서 유럽보다도 더 멀고, 더 모르는 나라 스리랑카. 홍차가 유명한 ‘실론티’(스리랑카의 예전 나라 이름이 실론)의 나라. 우리 옆에 있는 이웃 아시아인들을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가까이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동행취재 : 김문경 「파주에서」 이사 / 



한은숙  ‘성공회 파주이주노동자센터 샬롬의 집’ 사무국장



글 · 사진 | 임현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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