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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⑪ 임원경제연구소 풍석 서유구와 임원경제연구소

입력 : 2015-03-31 10:41:00
수정 : 0000-00-00 00:00:00

“흙으로 끓인 국이나 종이로 만든 떡 같은 학문은 하지 않겠다”



"문명은 번역으로 흐른다" - 임원경제연구소 정명현, 민철기 공동소장



 





 



일단 글을 쓰는 감정을 밝히고 싶다. 말하면, ‘떨린다’이다.



 



근래 어느 교육에서 강사가 “자기 삶의 멘토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50여 명 중 채 10명이 안되는 사람이 손을 들었다. 자기 삶의 모델, 아니면 ‘스승’과 같은 존재를 찾지 않고, 없어도 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 멘토나 스승의 자리에 ‘누가’ 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풍석 서유구 선생님과, 그 뒤를 따르는 [임원경제연구소] 자료를 찾아보며 가슴이 뛰고,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나왔다. 서유구 선생 탄생 250년이 돼서야 우리는 그를 스승으로 품게되다니!!



 



풍석 서유구 선생은 파주 장단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서명응은 정조가 세손이었을 때 정조의 스승이었고, 규정각 설립시 실무책임을 맡았던 대학자이다. 서유구 선생은 10대 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문장을 익히고, 22세에 책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다. 아버지 서호수도 규장각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국가적 편찬사업을 주도했다. 이런 가계의 학풍과 업적이 이어지면서 서유구 선생의 힘만으로 총 113권, 252만자의 대백과사전 [임원경제지]를 저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계 역사에 기록될만한 업적이다.



 





▲ 오사카부립도서관 소장 [임원경제지] 원본



 



“얼마나 산이 높은 지 모르고 시작한 거죠.”



여기 파주출판단지 한 귀퉁이에 풍석 서유구 선생을 가슴에 품고 13년째 [임원경제지] 번역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유구 선생의 사람들, 정명현과 민철기 두 공동 소장이 그다.



 



2003년 2월경 도올서원과 지곡서당 학생들이 주축이 돼서 고전번역팀을 만들자 의기 투합되었다. 15명이 모였다. 당시 도올 선생이 학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번역이라고 강조하며,“어떤 분야이든 번역은 반드시 하라” 했기에 뜻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그 때 임원경제지가 보였고, 그냥 시작했다. “산이 얼마나 높은 지 모르고 시작한 거죠.” 민철기 소장의 말이다. “당시에 3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완역과 출간까지 모두 3년 안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르고 달려든거죠. 그 때가 에너지가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 그 때 10년 계획을 세웠다면 출발하지 못했을 것예요.”



 



무도한 도전을 아름답게 한 사람들



석사 과정,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기꺼이 번역을 맡아, 매주 각자 분량을 온라인으로 올리고, 교열하면서 [임원경제지]번역에 힘을 모아준 연구자들. 지금까지 역자만 40여명이 넘고, 교열 교정까지 포함하면 70여명이 번역에 힘을 모았다.



 



정명현 소장은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논문을 내야 인정받고, 번역은 인정도 못받지만.... 문명은 번역을 통해 흐르고 흘러 왔으니까.” 그래서 시작된 [임원경제지]번역. 고전 번역의 현주소를 알아가다 보니 어려운 글자나 못알아보는 내용은 두루뭉실 넘어가거나 빼기도 하는 풍토가 보였다.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말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자. 그래야 다른 연구자가 제대로 연구할 수 있지 않겠나. 좋은 번역의 모델을 만들려고 노력을 했어요.”



 



고전번역팀이 만들어지자, 정명현씨는 자신이 영어강사로 일했던 학원 원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DYB최선어학원 송오현 원장이 답을 했다. 아무 말 없이 매달 연구비를 지원해주었다. 3억에서, 6억, 지금 10억을 지원해주었다. 정명현 공동소장의 표현을 빌면 60억 이상의 지원이었다. 어느 대학이나 기관 같은데서 돈을 주었다면 ‘좋은 번역의 모델’은 못 지킬 원칙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성과를 내야하고, 평가를 받아야하므로, 글자 하나를 붙들고 온갖 자료를 찾고 의미를 해석하는 일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송오현 원장은 그냥 말없이 지원해주었다. 말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이다.



 





▲임원경제연구소 상근연구원들



 



[임원경제지]처럼 농사도 짓고, 메주도 쑤고, ‘부의주’도 만들고....



번역을 하면서 언어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 현장에서 겪어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임원경제지 본리지에 나온대로, 쟁기질, 흙의 원리, 풀이 자라는 시절, 고랑 치기 등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다방면의 방대한 분야의 글을 번역하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서 묻고 공부했다. 농사 지으며 귀농운동본부를 찾았고, 한의학, 물고기, 건축, 요리 등의 전문가를 모셔서 공부도 했다. 정조지에 나온대로 부의주(통칭 동동주)를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만든 부의주는 정말 맛이 좋다. 이 부의주로 식초도 만들었다.”며 민철기소장이 자랑한다.



 



연구원들이 모여 직접 농사 지은 콩으로 서유구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메주도 만들어보기도 했다. ‘임원경제지 완역’을 위해 파주시장도 찾았다. 문화인들, 연구자들도 만나고 강의도 했다. 누가 시켰다면 못했을 일을, 오로지 ‘임원경제지 완역’이라는 고지를 위해 뛰었다.



 



이런 노력의 성과로 서유구 선생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임원경제지] 번역이 국가적 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면서, 2013년부터 한국고전번역원의 지원을 받고있다. 그러나 정명현 소장은 지금과 같은 지원으로는 앞으로도 10년이 걸릴 것 같다며, 번역 기간을 단축하는 방안을 바라고 있다.



 



지금은 가능한 한 외부 시간 다 끊고 번역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술도 끊고....



 



서유구 선생은 담론보다 현실 세계로 뛰어든 분



민철기 소장은 ‘임원경제지 완역’ 자체가 학계에 엄청난 변화를 줄 것이라 말했다.



“16지 각 분야가 전통지식의 집대성 역할을 하거든요. 혼자서 이런 작업을 했다는 것은 세계사에 없는 일일겁니다. 실제로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고, 요리도 직접하고.... 모든 것을 실험하지는 않았지만, 본인이 갖고 있는 도구와 범위 내에서 실험하려했고. 당대 지식인들과도 다르고, 지금 지식인과 학술풍토와도 다른 태도와 철학을 가지셨죠. 제대로 조명받을 날이 오겠죠? 저희 번역이 각 분야에서 그것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유구 선생을 실학자라 소개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으로 정명현 소장이 말을 잇는다.



“생활과 학문이 분리되어 있다고 했잖아요. 실학이라 하면 백성들의 좋은 삶을 위해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한 지식인 집단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 실학사상을 보면 서유구와 차이가 나요. 가장 큰 차이는. 그 사람들은 담론만 애기했고, 서유구 선생은 담론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곧바로 현실 세계로 뛰어든거죠. 그 당시 실학은 현실 정치를 바꾸거나 개선하자는 의미의 실학이었죠. 지금도 그래요. 정치가 이렇게 되어야한다, 사회가 이렇게 되어야한다는 말만 하거든요. 서유구는 정책도 세우고, 정책 비판 의식까지 있었지만, 실제모습을 바꿔야한다고 바로 현실로 들어간 분. 다른 분들과 비교할 수 없는 범주예요. 실학자 범주로 넣으면 안되요.”



 



조선 선비들도 [임원경제지] 전모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최남선, 정인지 같은 한학자도 임원경제지를 알지 못했다.



 



서유구 선생이 백성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며 40년간 집필한 임원경제지. [임원경제지]가 불러낸 살아있는 그의 제자. 정명현 민철기, 이 두 사람이 있어 우리에게 서유구 선생이 훌륭한 스승으로 되살아 나고 있었다. 제대로 평가도 못받고 흘러온 200년 세월을 이 젊은 학자들은 걷어내고 있었다.



 





▲임원경제지 표지



 



조선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파주에서 살렸으면....



백과사전은 당시의 지식을 집대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지식을 전문가의 도제 지식에서 대중의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오죽하면 프랑스 혁명은 그 30여 년 전에 쓰여진 [백과전서]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겠는가?



 



외국에서는 당대의 석학들의 집단적 작업으로 이룬 것을 서유구 선생은 40년이란 세월을 들여 외로이 일궜다. 이 기념비적인 노력을 보며, 한글을 창제한 세종과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 선생이 두 기둥으로 다가왔다. 조선말기의 시대를 구하려 했던 실학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개척한 진정한 실용주의, 실천주의, 지식인 계몽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여러 사람들이 모여 풍석문화재단을 만들고 있다. [임원경제지] 완역을 위한 재정적 지원, 풍석 서유구를 널리 알리는 일, 임원경제지 세계문화유산 지정 운동, 전통 문화파크설립 등의 사업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다 한다. 실용학문 분야에서 [임원경제지]가 빛을 발하고 있다. 건축에서([산수간에 집을 짓고]), 요리분야에서(문성희 [생명평화밥상]), 전통주 분야에서(박록담의 [전통주]) 등 구체적으로 살아나고 있다.



 



이것도 정명현, 민철기 소장 등 ‘살아있는 서유구의 사람들’이 임원경제지 완역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한 결실의 하나가 아닐까한다.



 



이제 머지 않아 [임원경제지] 완역본이 나와 암호같은 한문에서 동아시아 문명의 컨텐츠를 활짝 열어, 우리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요깃거리가 되었으면 한다.



 



풍석 서유구 선생이 태어나고, 자라고, [임원경제지]를 지으며 실험을 했던 이 곳, 파주. 우리 파주사람들이 [임원경제지] 완역에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했다. 풍석을 살리는 풍석의 고향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풍석을 살리고, 장단반도를 살리고, 임진강을 살리고, 실용 학문의 정신으로 남과 북으로 문명이 흘렀으면 좋겠다. 우리 파주가 그리 했으면 좋겠다.



 



 



글 · 사진 임현주 기자



자료 사진 임원경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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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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