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장단벌 중립국송환위원회 180일(2) - 송환거부포로들 3만명 수용, 240만평 힌드 나가르
[특별기고] 장단벌 중립국송환위원회 180일(2)
장단벌의 인도마을(힌드나가르), 3만명의 텐트 도시
- 송환거부포로들 3만명 수용, 240만평 힌드 나가르
- 송환거부포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국제적인 중립주의와 비동맹주의의 태동지
장단벌송환거부포로캠프(우)와 인도군감시초소(좌)
이같은 포로 수용과 설득 관련 시설 외에 인도관리군 6천명의 막사, 5개 중립국송환위원회(인도, 스위스, 스웨덴, 체코, 폴란드)에서 파견된 장성급 장교를 단장으로한 각 50명 내외의 감독관들을 위한 숙소, 그리고 병원시설과 기타 부속시설 등까지 합하면 힌드나가르의 총면적은 7.9㎢(약240만평)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략 여의도 전체면적과 맞먹는 넓이가 되니 얼마나 큰 규묘였던가는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이곳에 수용된 구성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장 많은 것은 북한군 지원에 나섰던 중공군포로로 1만 4,704명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북한군 포로로 평양으로의 귀환을 거부한 7,900명 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공산군측의 포로가 되었다가 송환을 거부한 포로 359명 등 모두 2만 2,963명 이었습니다. 공산군측의 포로 가운데 국군 즉, 남한 출신은 335명 이었고 미군 출신 23명, 영국군 출신 1명 등이었습니다. 공산군측은 평소 10만명 이상의 전쟁포로가 있다고 자랑을 해왔기 때문에 유엔군측에서는 지나치게 작은 숫자에 여러차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특히 북한측은 불과 2~3년 사이에 대부분의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북한군에 편입했던지 아니면 민간인 신분으로 전환되었다며 더 이상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이들 사라진 전쟁포로들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원래 제네바협약에 따르면 전쟁포로는 원소속 국가로 돌려보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유달리 송환거부포로가 많았던 이유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남한의 대부분 지역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북한군이 들이닥쳐 북한군으로 징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체포당시 북한군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대부분 고향이 남한 이었기 때문에 포로송환 당시 ‘평양’으로 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전쟁 휴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포로들은 두가지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즉, 주로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포로들은 모두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이었기 때문에 휴전협정의 발효만을 기다리고 있던 포로들인데 반하여 송환거부포로들은 전국의 10여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휴전 후 설득작전을 위해 모두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송환거부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한 텐트시티를 건설하고 힌드나가르 입구에 간판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휴전후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포로들을 놓고는 모택동 중공정부와 장개석 대만정부가 치열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한국군 포로들을 놓고는 이승만 남한정부와 김일성 북한정부가 치열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전쟁은 어차피 휴전으로 즉, 무승부로 끝난 마당에서 이 설득과정을 통하여 포로들 중 한 명이라도 더 자유민주주의 진영 혹은 공산주의 진영을 택하게 함으로써 자신들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힌드나가르에서의 총성없는 전쟁을 위하여 양측은 자신들의 정보요원들을 힌드나가르내 병원의 의료진이나 각종 노무자로 위장 침투시켜 송환거부포로들과의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그 와중에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여 포로나 관리군 등 전체 10~20명이 사망하는 사건사고도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자질구레한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인도군의 힌드나가르 파병은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한 테이블에 공존할 수 없었던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한 테이블 위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내는 최초의 선례를 보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는 중립정책의 선도국가가 되어 1954년에는 프랑스로부터 인도지나 독립전쟁의 중재를 맡았습니다. 이듬해인 1955년에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서 인도의 네루 수상과 중국의 주은래 총리의 주도하에 비동맹주의의 본격적인 태동을 가져와 인도는 중립주의 혹은 비동맹주의의 태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지역은 한국전쟁에서 송환거부포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국제적인 중립주의와 비동맹주의의 태동지이며 동시에 국제평화운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역은 어디일까요? 바로 파주시의 북단에 위치한 장단벌입니다. 오늘날 도라산역 평화공원 일대에서 동남쪽으로 캠프 그리브스까지의 광활한 지역이 바로 80년전의 힌드나가르인 것입니다. 임진각쪽에서 바라본다면 곤돌라를 타고 강을 건너 캠프 그리브스 지역에서 북서쪽으로 도라산역까지에 해당하는 지역인 것입니다.
이 지역은 1954년 2월 24일, 인도군이 제3국을 택한 반공포로 88명(한국인 76명)을 데리고 인도로 철수한 뒤 미군에 의해 철거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오늘날 DMZ와 남방한계선 사이의 민통선지역으로, 기차타고 임진강을 건너 도라산역으로 접어들면서 오른편 잡초더미 속에 묻혀있는 야산들이 그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오랫동안 인도연구와 한국전쟁에서의 인도의 역할을 연구해오며 힌드나가르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한국전쟁사나 한국사에서 파주시가 차지해온 지정학적 위상의 재조명이 필요함을 제기해 왔습니다. 이를 위하여 힌드나가르를 복원하고 인도와 한국 간 80년전에 존재했던 혈맹관계의 재정립을 촉구해 왔습니다.
물론 240만평에 달하는 힌드나가르 전지역을 복원하는 것은 비용과 시간의 문제도 크고 그 필요성도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송환거부포로 캠프의 기본형인 1개 컴파운드와 설득부스의 복원 등 즉, 축구장 1개 정도를 우선 복원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또한 중립국송환위원회 5개국의 업적 및 평화중재기록 등을 발굴하고 수집하여 이곳이 20세기 세계사의 조류에서 한 획을 그었던 중립주의와 비동맹주의의 탄생지임을 남기는 일도 필요합니다.
이 지역에서 이같은 작업의 추진은 전쟁사적 측면이나 생태학적 측면에서의 필요성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세계사적 의미와 국민교육적 차원에서의 의미는 물론이고 지역 관광자원의 확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차분히 진행시켜 나간다면 100년이 되는 2050년(6.25를 기점으로) 우리는 세계평화운동의 발상지이자 이데올로기대립을 화해로 이끈 ‘국제평화도시 파주’, 수많은 세계인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화해의 도시 파주‘를 보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불꽃은 파주에서 지펴져야 합니다. 파주시민들의 몫인 것입니다.
자, 이제 75년전 역사의 현장에 올라서서 미래 100년의 도시 파주로 함께 여행을 떠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라윤도
한국외국어대 인도어과 동 대학원 졸업
인도 Sansthan, 델리대학원 수학. 정치학박사
건양대학교 명예교수
‘힌드나가르’ ‘언론인 간디’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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