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전화연구소 칼럼 - 기후재난 시대, 혐오와 폭력의 그림자를 직시해야 한다
기후재난 시대, 혐오와 폭력의 그림자를 직시해야 한다
녹색전환연구소 경제전환팀 정영주 연구원
여름이 끝났다. 유난히 긴 폭염과 크고 작은 재난들이 연이어 발생했던 여름이었다. 재난 소식이 일상처럼 전해져 오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우연히 본 영화 ‘해피엔드’는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일본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는다. 총리 피습과 대지진 가능성으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인구 감소와 외국인 유입 속에 극우 정권의 부상으로 차별과 혐오가 일상화되어가는 일본 사회를 그려낸다. 학교에서는 대지진 대비 안전 교육을 할 때, “진짜 일본인이 아니면 밖에 나가서 자습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등장인물인 재일한국인 4세 쿄우의 어머니는 운영하는 한식당 앞에 적힌 ‘비국민(非國民)’ 낙서를 묵묵히 지우며 일상을 이어간다.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네오 소라 감독은 이같이 묻는다. “관동대지진 당시 무고한 조선인들이 학살당했죠. 미래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과연 상황이 달라질까요?” 작품은 결국 ‘재난이 닥쳤을 때, 사회는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실제 재난은 모든 이에게 동등하지 않다. 기후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여성·아동·이주민·다문화 가정 등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 폭염과 폭우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쪽방촌 주민들처럼 계급과 성별, 연령, 주거환경에 따라 피해 정도는 상이하다.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기후재난 시기에 더욱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남아시아에서는 평균기온이 1도 상승할 때 가정 내 폭력이 6% 이상 증가했다. 아프리카 지역 연구에서는 이상기후 발생 시 여성이 파트너로부터 학대를 당할 확률이 60%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폭염으로 일감이 줄어 경제적 충격이 생기면, 남성 가장의 분노와 스트레스가 대부분 아내에게 향한다”고 지적한다. 여성들은 저임금·비정규직·돌봄 노동에 집중되어 경제적 타격을 더 크게 받고, 재난 시에는 무급 돌봄 부담과 성폭력 위험까지 떠안는다.
해결책은 단순한 기술이나 인프라 확충에 있지 않다. 기후정책은 성인지적 관점에서 설계돼야 하며,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돌봄 시스템을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여성과 아동, 이주민 등이 직접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돌봄노동을 사회적 인프라로 인정하며, 지역 공동체 기반의 회복력 강화가 뒤따라야 한다. 국제적으로도 ‘성인지 기후금융(gender-sensitive climate finance)’과 돌봄경제 투자를 통한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영화 속 질문은 더 이상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기후재난은 자연현상을 넘어 사회적 폭력의 촉매가 된다. 우리가 지금 돌봄과 연대를 선택하지 않으면, 미래의 재난은 특정 집단에게 또다시 혐오와 폭력으로 덮쳐올 것이다. 기후위기에 정의롭게 대응한다는 것은 곧 모든 이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