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금개혁절차법’, 이재명 정부는 왜 만들어야 하나?
‘공적연금개혁절차법’, 이재명 정부는 왜 만들어야 하나?
- 분명한 목표와 원칙, 권한과 책임의 컨트롤타워, 끈질긴 정책교환 협상
이재섭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전 서울신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 압박은 한국 경제에 분명한 위기였다. 그러나 그 과정을 천천히 복기해 보면, 우리가 연금개혁에 그대로 가져와야 할 결정적 교훈이 있다. 그때 한국은 감정적 맞대응 대신, 몇 가지 분명한 국가 원칙을 세웠다. “국익 최우선, 동맹 관리, 글로벌 공급망 신뢰 유지.”
이재명 대통령은 협상의 원칙을 명확히 하고, 관련 부처와 전문가에게 필요한 책임과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했다. 실무진은 여론의 눈치나 사후 책임에 연연하지 않고 데이터에 기반해 전략을 세우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그 결과 전면 충돌이나 일방적 피해를 막으면서, 산업·투자·안보를 묶은 협상공간을 확보해 나갔다. 국내 마가(MAGA) 추종세력들의 방해공작과 세계 제1의 강대국 미국의 무차별적 전방위 관세 압박을 이겨내며 믿기 어려운 성과를 얻었다.
여기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내·외부의 집요하고 강력한 압박에 대응한 한국 정부의 리더십과 전략 운용 방식이다. 여기에는 최고 리더십의 책임 있고 명확한 방향과 원칙 제시, 실질적 권한을 부여받은 컨트롤타워, 자부심을 가진 다양한 분야의 공무원과 전문가, 기업가들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협상 전략 수립과 과감한 실행이 있었다.
연금개혁의 성공 요인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필자는 지난 정부에서 국회에 어설프게 연금개혁 특위가 설치될 때, 그리고 개혁 논의가 난파선처럼 떠돌며 파행될 때마다, 여러 차례 이 지면 등에 칼럼을 실어 연금개혁 실패를 예견하고 경고하고 제언한 바가 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예견대로 연금제도 전반이 아닌 국민연금만의 모수개혁(보험료와 급여의 숫자만 조정하는 방식)으로 임시 봉합 된 채 개혁 논의가 멈추었다.
실패가 예정됐던 윤 정부의 연금개혁논의, 책임 소재와 로드맵이 결여
필자가 지난 정부의 연금개혁 실패를 초기부터 예견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들 중 하나는 '개혁 초기에 책임 있는 개혁구도와 로드맵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대양을 항해하겠다는 배가 가야할 항구도 설정하지 않은 채, 배의 운항을 책임질 선장도 없이, 심지어 유능한 항해사들과 기관사들의 손발을 묶어놓고 서둘러 항구를 떠난다면 그 배의 운명은 자명한 것이다.
당시 윤석열 정부는 ‘원대한 개혁 구상(말로 내세운 것이었지만)을 책임 있게 수행할 수 있는 개혁기구와 실행 로드맵’ 설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책임질 방법도 없는 정치기구에 뚜렷한 방향도, 원칙도 제시하지 않은 채 연금개혁을 떠 넘겨 버렸다. 그 순간, ‘공적연금개혁의 정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개혁 실패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윤 정부의 행태보다도 더 이상한 것은 어떤 정당도, 정치인도, 언론도, 학자도 여기에 입을 꼭 닫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후에 추스르기 어렵게 단추를 잘못 끼운 나쁜 개혁이 성사되기 보다는 중단된 개혁이 차라리 낫다. 공적연금의 백년대계를 재설계할 수 있는 구조적, 근본적 개혁 개혁의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려운 관세 협상을 성공해 낸 이재명 정부에서 다시 연금개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희망을 갖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개혁 논의에 앞서 ‘연금개혁절차법’ 논의를 먼저 해야
“개혁 방향과 내용에 대한 논의에 앞서서, 자신의 이름으로 개혁안을 만들고 책임질 수 있는 개혁구도를 설계하고 이를 담보할 수 있는 ‘공적연금개혁절차법’을 먼저 제정하라”는 것이 이글의 핵심 주장 요지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얼마를 더 내고 덜 받느냐”의 논쟁이 아니다. 먼저, 정부와 여당이 국정의 책임자로서 현 노후소득보장제도에 문제인식과 책임성을 확고히 선언하고,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그 다음에, 정부여당과 함께 야당들도 자신들의 입장을 정책으로 구현할 유능한 전문가를 영입하고 그의 이름을 걸고 각자의 연금개혁대안을 만들어 경쟁하게 해야 한다. 그런 후에 선정된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의회’의 숙의토론과 대안 선택을 거쳐, 국회가 시한 내 결론을 내리도록 강제하는 ‘연금개혁절차법’의 제도화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연금개혁절차법’의 제정이 필요한지, 그럴 필요성이 과연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은 우리나라 공적연금제도 전반이 어떤 중병에 걸렸는지 그 실상을 살펴보고,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이해해야 가능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공적연금은 중병에 걸려 있어
지금 한국의 연금 위기는 재정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공적연금제도의 역할과 정체성의 부재, 공적연금제도 상호간의 역기능, 불공정과 비효율로 등으로 인해 심각한 중병이 들어 있다. 이것은 필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국내외 공적연금 전문가들의 보편적인 평가다.
1. 각 연금제도의 정체성 부재와 체제 간 정합성 문제- 역할이 불분명하고 뒤섞인 구조
현재 공적연금 체계의 근본 문제의 핵심은 각 제도의 존재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기초연금, 국민연금, 특수직역연금, 퇴직연금이 기능 수행을 못하거나, 서로 단절되거나, 서로의 기능을 침범하며 시너지가 아니라 역기능을 수행하며 불신과 불공정을 증폭시키고 있다.
첫째, 기초연금은 연금제도이기보다 사회부조에 가까워 어떤 기능에도 충실할 수 없고 국민연금과의 역할이 중복, 상충되고 있다. 특수직역 종사자들과는 이유 없이 단절되어 있다.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고 국제사회에서도 연금제도록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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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하위 70% 중심 설계를 표방하지만, 복잡한 소득·재산 기준과 국민연금 감액 규정 때문에 “내가 계속 받을 수 있을지, 얼마나 받을지”를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빈곤을 확실히 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보편적 권리로 자리 잡지도 못한 채, 모호한 제도로 남아 있다.
둘째, 국민연금은 소득보장도 재정안정화도 담보하지 못하는 설계에 재분배 논란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 연금제도 안에 소득보장, 빈곤예방 기능과 자영업자 포함 모든 직역의 종사자들을 연대시키는 올인원(all in one) 제도로 설계되어 어떤 기능도 충족시키기 어렵다. 더구나 사회적 연대에 앞장서야 하는 특수직역종사자들을 배제하고 있어 사회적 연대 연금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중심 연금으로서의 명분을 상실하고 있고,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국민연금은 소득재분배 기능을 내세우지만, 현실에선 저소득·불안정 노동자가 가입·유지에서 밀려나고, 안정·고소득층이 더 오래 가입해 더 많은 급여를 가져가며, 가입자 평균소득에 연동되는 산식이 전체 급여 수준을 깎으면서 제도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기초연금과 재분배 기능의 중복, 상호 역효과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재분배 산식이 실질 형평성도, 제도 신뢰도 확보하지 못한 채 청년 세대에 “내가 내는 돈이 진짜 나에게 돌아오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제도가 되고 있다. 여기에 가입인정 소득 상한제와 가입자 평균소득에 의한 전체 연금액 수준의 하향화 등으로 인해 중산층 가입자들이 충분한 연금확보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가는 소득 계층별 차별화된 제도로 노후소득을 보장하도록 연금제도를 설계하라는 국제기구들의 권고에 반하고 있다.
셋째로, 특수직역연금제도의 구조가 민간 국민연금제도와 다른데서 오는 갈등과 불화가 심각하다. 사회적 연대에 앞장서야 할 공직자들이 오히려 사회적 배제를 당연시 하고, 노후소득보장에서의 사회적 차별을 용인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군인·공무원·사학연금 등 특수직역연금은 과거 국가인력정책의 산물이고, 그들 신분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보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국민들과 함께 누리고 함께 연대해야 할 부분(빈곤 예방과 기본적 노후소득보장)은 민간인들이 가입한 국민연금과 설계를 같이 하고, 그들의 신분상의 특수성은 고용주(국가)가 책임지는 퇴직연금 부분에서 배려되도록 분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제적 보편적 기조이고,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라는 ‘정의’와 ‘형평성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넷째, 퇴직연금의 부실이다. 퇴직연금은 애초 민간 근로자들의 퇴직 시 일시금으로 지급하던 것을 연금으로 받을 수 있도록 2005년에 제도화한 것이다. 하지만 일시금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고 퇴직연금의 기초가 되는 기금자산의 운용수익이 국민연금 기금의 운용수익에 비해 월등히 낮아서 노후소득보장제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에 대한 창의적이고도 새로운 차원의 제도 논의가 필요하다.
다섯째, 연금액 조정방식(indexing)의 불공정성을 시정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연금액 조정은 연금가치를 국가가 보전해 준다는 명분에서 도입한 공적연금의 가장 우월한 제도 중 하나다. 문제는 연금을 많이 받는 자에게 연금액이 미미한 자들보다 연금의 절대액을 많게 국가가 매년 추가로 지급해주는 것이 공정한가 하는 것이다.
연금액 조정을 통해 수 백 만원의 연금을 받는 고위 공직자자 부류는 수 십 만원이 증가한 연금을 받아간다. 반면 수 십 만원의 미미한 연금을 받는 민간 근로자 출신 연금 수급자들은 아주 미미하게만 증가한 금액을 받게 된다. 이런 차이가 수십 년 간 복리로 누적된다면 어떤 부류의 노인들은 연금 귀족으로 살아가게 되고, 어떤 부류의 노인들은 연금 빈곤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를 그냥 두어도 될 것인가?
요약하면, 기초연금은 불충분하고 애매하며, 국민연금은 불투명하고 설계 논리가 뒤틀려 있고, 특수직역연금은 형평성 논란을 키우며, 퇴직연금은 기능 상실이고, 연금 조정 구조는 역진적이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두고는 빈곤예방과 노후소득보장은 물론 장기적 재정안정화 논란도 불식시키기 어렵다. 나아가 직역 간, 소득 계층 간, 세대 간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게 된다. 사회적 연대연금이 사회적 불씨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2. 구조개혁의 방향- 세 가지 축으로 단순하고 공정하게
연금개혁의 방향은 복잡할 필요가 없다. 국제 기준과 한국 현실을 함께 놓고 보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편에 가까운 기초연금으로 노후생활의 바닥을 확실히 다져야 한다. 기초연금을 노후빈곤 방지 1층 제도로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상위 고소득자들의 과도한 연금 조정은 별도의 환원 조치들 도입 가능)
둘째, 국민연금은 소득비례연금으로 전환하되 저 소득자, 사회적 기여자들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을 강화하여 모든 국민을 위한 실질적 중심 연금으로 자리 잡게 해야 한다. 국민연금을 ‘알 수 없는 세금’이 아니라, 계약 가능한 믿을 수 있는 제도로 만들어 젊은이들을 포함한 중산층들에게도 충분한 연금을 확보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셋째, 퇴직연금을 진짜 연금화하야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퇴직급여는 연금 형태로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자산운용 수수료 상한제, 디폴트 운용, 장기 수익률 기준에 대한 국가 감독을 강화 등으로 퇴직연금이 실질적으로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넷째, 특수직역연금을 민간 근로자가 가입한 국민연금과 구조를 일원화하고 재설계 한다. 즉, 기초·소득비례 부분은 국민연금과 동일한 구조와 원리로 통일한다.(공무원 퇴직자도 기초연금 수령). 군인·경찰 등 직업 특수성은 퇴직연금·보충급여 부분에서 합리적으로 반영한다. 신규제도는 개혁 이후부터 적용하도록 하고 기득권은 급격한 소급삭감이 없이 연착륙을 도모한다. 복수 공적연금 수급자나 과도한 고액 연금에 대해서는 상한제, 누진 연금소득과세, 일정 부분 환수 등을 도입해 제도 전체의 정당성과 재정 여력을 확보한다.
이 네 가지 축이 결합될 때, 보편성, 공정성, 예측가능성, 지속가능성이 함께 작동하는 한국형 신 연금제도로의 개혁이 가능해진다. 공적연금의 주된 목적인 빈곤예방과 적절한 노후소득보장은 물론 장기적 재정안정화, 직역 간, 소득계층 간, 세대 간 형평성과 공정성을 제고하는 ‘사회적 연대연금체제’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구도로 어떤 절차로 개혁안을 만들고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3. 이름을 건 복수의 개혁안, 국민의 선택, 그리고 ‘연금개혁절차법’ 제정
연금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략은 분명하다. 국가(정부)가 연금개혁의 대원칙을 선명히 밝히고, 각 정치세력(정당)은 최고의 연금전문가에게 자기 이름을 걸고 개혁안을 만들 수 있도록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며, 그 안들을 국민의 숙의 토론과 선택을 거쳐 국회가 시한 내 입법으로 마무리하도록 제도화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연금개혁절차법」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백년대계의 좋은 연금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다.
대통령과 정부는 연금개혁 방향과 원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여당을 포함한 야당과 정당은 자신들의 안을 실명으로 제시해야 하며, 국민은 충분한 정보와 토론을 거쳐 선택에 참여하고, 국회는 더 이상 미루지 못하게 한다.
이를 충실히 이행하게 담보하는 것이 ‘연금개혁절차법’ 제정이다. 즉 성공적 개혁의 판을 짜는 법이다. 만약 ‘연금개혁절차법’이 잘 제정만 된다면, 그토록 어렵다고하고 지지부진해왔던 연금개혁을 마침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믿기 어려운 한국판 K-연금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재섭 님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영국 켄트대학교에서 사회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2007년 국민연금개혁의 제도·정치’ 주제).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연구소장과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공적연금수급자유니온’ 공동대표. ‘사람을살리는사회정책연구소(사·정·연) 소장. ‘공적연금강화’와 ‘공적연금 체제·구조개혁’운동가. 은퇴(노후)설계 전문가. 시인·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