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소사이어티 칼럼] 38년간 지내온 기우제, 개헌의 비는 언제 내리는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칼럼] 38년간 지내온 기우제, 개헌의 비는 언제 내리는가?
정정화 교수(강원대 공공행정학과)
“우리는 지난 38년 동안 기우제를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해가 쨍쨍한 것을 보니 개헌의 비는 내리지 않을 것 같네요.”
지난달 29일 국정기획위원회 산하 국민주권위원회가 주관한 시민참여형 개헌을 위한 간담회에 참석한 H변호사는 하늘을 쳐다보며 느닷없이 기우제를 꺼냈다. 40도를 육박하는 찌는듯한 복더위에도 정부서울청사 청성별관에 모인 개헌운동단체 대표들은 어쩌면 ‘개헌의 단비’가 내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울한 전망에 한숨을 내쉬었다. 내년 6월 지방선거에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지 못하면, 차기 대통령 후보가 부상하는 2028년 총선에서도 개헌이 무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개헌은 이재명 대통령의 핵심 공약일 뿐만 아니라 민주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적극적인 입장이서 외견상으로는 어느 때보다 성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개헌이라는 블랙홀에는 디테일에 숨어있는 악마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고무적이다. 국정과제에 개헌이 포함될 것은 거의 확실하고, 국회에도 3건의 개헌절차법이 발의되어 있다. 가을 정기국회에서 개헌절차법이 통과되면 드디어 기우제가 효험을 발휘할지 모른다. 그런데 개헌 방식을 보면 시민의회형(김종민의원안), 국민청원형(김성회의원안), 추진협의회형(황운하의원안)으로 너무나 제각각이다.
1.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한 500명의 시민의회형(김종민의원안)
대통령 선거 이전인 지난 5월에 발의된 김종민의원안(국민참여 헌법개정 절차에 관한 법률안)은 헌법개정시민위원회가 핵심이다. 인구통계적 대표성(성별, 연령, 지역)과 사회경제적 배경을 고려해 500명 규모의 시민위원을 2단계 층화표본 추출로 선발하는 전형적인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 방식이다. 아일랜드에서 2012년과 2016년 두차례 개헌시민의회를 소집해 동성결혼과 낙태를 금지한 헌법을 개정한 것이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이에 앞서 아이슬랜드에서도 2010년 시민의회 방식으로 개헌안을 마련해 국민투표에서 통과된 전례가 있다. 아이슬랜드 사례는 정치권의 반대로 국회 통과는 무산되었지만, 온라인 플랫폼과 SNS를 통해 3,500건의 국민의견을 수렴해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종민의원안도 이같은 방식으로 시민기초안을 마련해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개헌특위에서 2/3 찬성으로 의결하는 방식이다. 개헌안은 다시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2/3 찬성(200표)으로 가결되면 국민투표에 부쳐 최종 확정된다. 김의원은 2017년에도 이와 유사한 개헌절차법을 발의한 적이 있다. 당시의 ‘헌법개정 시민회의’는 개헌특위 산하의 단순한 자문기구에 불과했지만, 이번 헌법개정시민위원회는 자체적으로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민기초안에 대해 개헌특위가 ‘존중하여야 한다’(제5조 2항)는 정도로 구속력이 약한 것이 한계로 남아있다.
2. 50만명 이상 국민 서명으로 개헌안 청원(김성회의원안)
국민청원형으로 불리는 김성회의원안(헌법개정 절차에 관한 법률안)은 50만명 이상 국민 서명으로 개헌을 청원할 수 있다는 것이 획기적이다. 사실상 국민발안 개헌의 전초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과 ‘빛의 혁명’을 거치면서 직접민주주의를 열망해온 개헌단체들의 핵심 이슈가 국민발안제 도입인 만큼 김성회의원안에 대한 지지가 높아 보인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국민주권 정부의 국정철학과도 상통해 정부·여당에서 선호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다만, 개헌특위 산하에 국민개헌청원심사소위원회를 설치해 여기서 국민청원 개헌안의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최대 걸림돌이다. 기본권은 물론이고 헌법전문과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첨예한 이해대립과 가치관이 격돌하는데 심사소위원회가 어떤 숙의 절차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상충된 개헌안을 조율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김성회의원안도 이같은 문제점을 인식해 국민적 공감대와 사회적 합의도출을 위해 ‘헌법개정국민자문위원회’를 설치해 보완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제5조). 하지만 국민자문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3. 내년 6월 개헌이 목표인 단기속성형(황운하의원안)
조국혁신당 황운하의원안(헌법개정 및 정치제도 개혁의 일정과 절차에 관한 법률안)은 내년 6월 개헌을 목표로 한 단기속성형이다. 앞서 간담회에서 기우제를 언급했던 H변호사가 초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이 법안은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치개혁과 함께 개헌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감이 묻어난다. 여야 국회의원, 시민단체, 전문가 등 50명 이내로 구성된 추진협의회에서 올 12월 말까지 초안을 성안하면 개헌특위에서 2026년 3월 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는 로드맵으로 되어 있다. 추진협의회의 활동기한도 2026년 3월로 못 박아 배수진을 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내년 6월 개헌이라는 데드라인에 쫓겨 사회적 합의와 숙의(deliberation)가 생략된 것이 최대 약점이다. 추진협의회에서 올 연말까지 초안을 마련하려면 여야가 합의하고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미니 개헌’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추진협의회가 정치인과 소수의 전문가로 구성되는 점도 국민주권시대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 법안 제3조에는 ‘모든 국민은 개헌 관련 정보를 제공받고 의견을 제출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의견 수렴 절차와 방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기간의 공론조사를 실시할 시간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맹점이다.
이에 비해 김성회의원안은 2028년 4월 총선을 앞둔 2027년 11월 말까지 개헌특위에서 입안하도록 명시해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다.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지 않겠다는 것을 명확히 밝힌 셈이다. 50만명의 서명을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김종민의원안도 시민의회의 구성 및 운영에 1년 정도가 소요되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년 6월 개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4. 대안: 국민청원을 거쳐 시민의회를 통해 2028년 개헌
‘빛의 혁명’에 이어 ‘우리도 헌법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연성헌법 주창자들은 황운하의원안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섣부른 밥에 체할 수 있다’는 속담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87년 헌법 탄생의 전철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김종민의원안과 김성회의원안을 합쳐 통합 개헌절차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국민청원을 거쳐 시민의회에서 숙의하는 절차를 결합하면 두 법안이 지닌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다. 절충안은 국회 논의과정에서도 수용가능성이 높아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
다만, 이 경우 국민청원 서명인 수를 김성회의원안의 50만에서 20만~30만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 국민투표와 결합된 국민발안제는 통상 서명 규모를 유권자의 1% 또는 100만 정도를 요구하고 있지만, 국민청원도 이에 준하여 과도하면 다양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 표명이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소 문제가 있는 개헌안이라도 시민의회에서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숙의과정을 거치면 포퓰리즘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개헌 시기는 국민청원 서명 기간과 시민의회운영 기간을 포함하면 적어도 1년 6개월은 소요되기 때문에 2028년 4월 총선이 현실적이다. 이런 개헌절차법이 제정되면 우리는 다시 기우제를 지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 필자 소개: 정정화 강원대 공공행정학과 교수는 현재 국민주도상생개헌행동 공동대표 겸 정책위원장과 시민의회 전국포럼 공동대표를 역임하면서 시민의회를 통한 헌법개정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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