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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강물에 새긴 이야기 ① 연강에 뜬 배

입력 : 2015-04-16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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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정과 웅연, 다시 쓸 수 없는 역사

이번 호부터 ‘임진강, 강물에 새긴 이야기’연재를 시작합니다. [임진강기행]을 집필하신 이재석(DMZ생태평화학교 교장)은 민통선 해마루촌에서 매일 임진강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파주에서] 지면에서 만나게 되는 임진강 곳곳을 조합원들과 함께 매달 넷째 토요일 나들이 가게 됩니다. <편집자주>

 
옥녀봉에서 본 임진강 | 아래 보이는 곳이 웅연이다
 
 

3백 년 전 어느 날, 우화정에 배가 떴다.

세 사람의 주객이 우화등선했다. 음식을 실은 배와 기녀들의 배가 따랐다. 배는 굽이굽이 출렁대며 기웃기웃 흘러간다. 술잔이 오가고 물고기 회에, 노루를 통째로 굽는다. 저녁이 되자 흥취를 깨는 사나운 바람이 일어났다. 배는 번개 치듯 달려 나아간다. 마침내 웅연에 닿아 노 젓기를 멈춘다. 기병과 취악대가 나루를 감싸고 배를 맞이한다. 기다리는 횃불은 도시처럼 환하다. 모래뿐이던 임진강이 모처럼 북적였다.

 

2천년 전 어느날, 한 무리 사람들이 지나갔다.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좁은 골짜기가 저자처럼 시끄러웠다. 먼 북쪽에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던 사람들이라 했다. 북쪽의 새 왕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이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지나간 뒤 강가에는 고인돌 대신 돌무지무덤이 세워졌다. 그들이 그렇게 했다. 큰 돌을 잘라내는 대신 강돌을 주워 모았다. 돌은 작았지만 무덤은 컸다. 장학리에도, 횡산에도, 삼곶리에도, 새 무덤이 생겼다.

 

 

 

65년전 어느 날인가? 한 사내가 강을 건넜다.

전선이 몇 차례 오가고 수없는 사람이 스러진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사내는 등에 아이를 업었다. 아이는 금세 숨이 넘어갈 듯 깔딱거렸다. 강 건너 삼거리 마을에 유명한 의원이 있다. 임강마을 아내는 남편과 아이를 기다렸다. 베티고지, 노리고지, 피의 능선. 여울 물소리를 집어 삼키던 아우성과 폭음이 문득 사라진다. 강은 조용해졌다. 침묵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웅연 아래 징파나루 | 임술년 배도 저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임진강 적벽놀이 길고 긴 강의 역사 가운데 떠올려 본 몇 장면이다. 첫 장면은 임진강에서 적벽 뱃놀이를 즐기던 모습이다. 주인공은 당시 경기관찰사 홍경보, 연천현감 신유한, 화명을 떨치던 겸재 정선이다. 1742년 시월 보름. 이 날은 소동파가 적벽부를 지은 해와 갑자가 같은 임술년에다 날짜도 같은 시월 보름이었다. 배에 오른 장소도 삭녕의 우화정이었으니 이 또한 적벽부에서처럼 우화등선한 셈이었다. 이들은 연강임술첩을 묶어 이날을 기념한다. 신유한은 글을 짓고 정선은 그림을 그렸다. 신유한은 “글의 빼어남은 소동파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뱃놀이의 정취로 본다면 못할 것이 없다”고 자부한다. 정선은 우화정에서 배에 오르는 장면(우화등선)과 웅연에 배를 대는 장면(웅연계람) 두 점의 그림을 그렸다.

 

온조가 백제를 세우다

두 번째 장면은 온조 일행이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는 노정이다.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세운 소서노와 아들들은 주몽의 아들 유리가 나타나자 권력에서 밀려난다. 스스로를 혹 덩어리로 비유한 이들은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터전을 찾는다. 이들 백제 건국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온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임진강을 따라 내려왔다는 설도 그중 하나다. 강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나는 고구려식 적석무덤을 증거로 든다. 적석무덤을 따라 강을 내려오면 마지막 자리에 적성 육계토성이 있다. 육계토성은 백제의 궁성 풍납토성을 빼닮았다.

 

삼곶리적석총

 

김명익 단편소설 '림진강'의 한 장면

세 번째 장면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소설이고 역사가 아닌 현실이다. 김명익의 단편소설 림진강. 소설 주인공들은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실제 인물이라 해도 상관없다. 임진강에 이런 사람은 숫하게 많다. 아니 많았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하늘로 갔다. 소설 속 주인공은 고인이 됐을 것이다.

겸재 정선은 다시 우화정에 가지 않았다. 그는 유람객이었기 때문이다. 온조도 이곳 돌무덤을 찾지 않았다. 정처를 찾아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강을 건넌 사내도 임강마을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사이 휴전선이 놓였기 때문이다.

겸재는 다시 가지 않았지만 그림으로 남은 적벽놀이를 지금 따라할 수는 있을까? 할 수 없다. 온조가 남긴 적석무덤을 거슬러 볼 수는 있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 사이 휴전선이 놓였기 때문이다. 우화정도, 장학리 적석무덤도, 임강마을도 휴전선 북쪽이다. 웅연과 삼곶리무덤과 삼거리만은 남쪽 연천에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이재석(DMZ생태평화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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