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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45) 14. 침잠. 창강이 발 씻은 물 (2)마지막 조선인으로 산 고려유민

입력 : 2022-11-14 01:20:05
수정 : 2022-11-15 00:29:42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45)

14. 침잠. 창강이 발 씻은 물

(2)마지막 조선인으로 산 고려유민

 

중국의 김택영 묘. 남통시 문물보호단위 지정(1983년8월29일) 이하출처 상해한인신문

남통시 창강 김택영기념관

 

190599, 김택영은 시들어가는 나라를 등지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인천에서 뜬 배는 상해를 향했다.

동쪽에서 오는 살기 몹시도 음험하고 간악한데/ 그 누가 나라 위해 이 국난을 구제하랴/ 지는 해 뜬 구름 모두 천리에 뻗쳤는데/ 몇 번이나 고개 돌려 삼각산을 바라보았던가.(김택영. 9일에 배가 떠나갈 제 2수를 짓노라중 둘째 수)”

김택영은 914일 상해에 발을 디딘 뒤 104일 남통으로 간다. 그의 망명은 중국관료 장건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장건과의 인연은 20여년을 거스른다. 장건은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김택영을 만난다. 장건은 김택영의 시를 보고 조선에 와 처음 보는 명작라고 감탄했고, 김택영은 여러 편의 시를 더 지어 선물한다. 남통에 온 김택영은 장건이 설립한 한묵림인서국에 들어가 책을 편교하며 생활한다.

통주는 이때부터 내 고향 되었어라/ 마치 숭양 같기도 하고 서울 같기도 하네/ 장씨 집안에 좋은 형제 있으니/ 오랜 세월 원백처럼 한결같은 마음이어라(김택영. 4일 통주 대상방적 공장에 이르러 장퇴옹 관찰 숙엄에게 주다일부)

독립운동가 창강 김택영 옛집. 남통시 문물보호단위 지정(1998년11월29일)

 

그는 불우한 망명객이었지만 서국에서 책을 편찬하며 한중문화교류의 첫 장을 열어간다. 제목만 들어도 쟁쟁한 조선의 책들이 그에 의해 출간된다. 한국역대소사, 한사경, 신고려사, 교정 삼국사기, 중편한대숭양기구전등 우리역사를 다룬 책이 하나다. 독특한 역사해석과 함께 망국의 자리에서 쓰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 책들이다. 조선의 아름다운 문장을 소개한 문집도 꾸준히 출간한다. 중편이익재선생집, 여한구가문초, 중편연암집, 신자하시집, 김요천선생집. 절친 한 벗이자 당대의 문장가인 이건창의 명미당집, 황현의 매천집도 그의 손으로 편찬한다.

그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연암 박지원을 꼽았다. 북방 열하를 누빈 경험이 연암의 문학을 탄생시켰듯 그의 중국생활은 눌려있던 재능을 한껏 펼치는 기회가 됐다. 김택영의 삶은 망국 고려의 신하로 중국대륙을 떠돌던 고려사람 이제현과도 닮아 있다. 이제현은 중국에서 고려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며 중국인을 능가하는 한시를 남겼다. 김택영 역시 20여년을 중국에 머물며 그곳 문인들과 교류했다. 이제현이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개성팔경으로 표현한 것처럼 그도 고향 개성을 노래한다.

천마산 끊어진 곳에, 만장의 문필봉 있네/ 바로 개성의 동쪽에 있어, 구름이 신룡을 감싸 않은 것 같았네./ 원기는 어느 곳으로 돌아갔는가? 먼저 익재공을 낳았다네/ 우리나라는 삼천년간, 우뚝하게 사단태두 지었더라(김택영. 개성 문필봉노래일부)”

문필봉은 본래 극락봉이다. 김택영은 승려들이 부르는 이름을 쓸 수 없다며 문필봉으로 바꿔 불렀다. 그 산의 원기가 유학자 이제현을 낳고 이어서 숭양(개성)의 학자들을 배태했으니 극락봉이란 이름은 버리라고 말한다. 김택영은 개성 사람이란 자긍심이 높았다. 개성은 고향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에게 개성은 사라진 나라 고려를 뜻했다.

창강 김택영 선생과 교류한 중국인 장젠

그는 고려를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로 봤다. 신라가 뜨는 해라면 조선은 지는 해이니 고려야말로 중천에 뜬 해와 같다고 했다. 그는 고려유민으로 조선을 살았다. 개성의 위인들을 찾아내 숭양기구전을 지은 것도 그런 맥락 위에 있다. 그것은 단지 개성사람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고려라는 중천의 해를 바라보며 지는 해를 떠받쳐 보려는 고단한 몸짓이었다. 그러기에 조선이 망하자 이제는 조선역사를 쓰고 고려사, 삼국사를, 또 통사인 한국역사를 썼던 것이다. 그는 망명객으로 조선의 멸망을 바라보며 통곡했지만 황현의 길을 따르지는 않았다. 이미 고려 망국의 유민으로 살았기에 조선 유민의 운명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남통을 개성이나 서울 같이 여겼고 거기서 생을 마쳤다. 죽기 두어 달 전에는 수염과 머리카락을 베어 고향의 부모 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는 남통의 낭산에 묻힌다. 그의 묘 앞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섰다.

한시인(韓詩人) 김창강선생지묘

고려유민으로 조선을 지나 한인이 된 사람. 임진강은 고향사람 하나 누일 자리도 내어주지 못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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