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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79] 운남(雲南) 육군강무당(陸軍講武堂)

입력 : 2018-01-10 19: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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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79]

운남(雲南) 육군강무당(陸軍講武堂)





지난해 12월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유적을 찾아 참배했다. 이 일로 중국내에 있는 우리의 독립운동 관련 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국내에는 독립운동 관련 유적이 여러 곳에 널려있는데 역사적 중요도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많다.

중국 운남성 곤명(昆明)에 있는 육군강무당은 하북성 보정(保定)군관학교, 광주 황포(黃埔)군관학교와 함께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저명한 세 곳의 군사학교로 평가된다. 황포와 보정의 군관학교는 전란을 겪으며  그 터가 일지감치 사라져버렸으나 곤명의 강무당은 지금까지 건물과 터가 잘 보전되어 있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청(淸)왕조 말인 1909년에 설립된 이 학교 출신의 교직원과 졸업생 가운데서 신해혁명(辛亥革命)에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중국근대사에서-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을 가릴 것없이-중요한 역학을 한 군사지도자들이 많이 나왔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인민해방군에 계급제가 도입되면서 10명의 원수(元帥)가 임명되었는데(1955년) 그 중 두 사람이 이 학교 졸업생이었다(주덕朱德과 섭검영葉劍英).

이 학교의 졸업생 가운데서는 네 개 나라의 국방장관과 군대 총사령관이 나왔다. 주덕(1886-1976)은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섭검영(1897-1986)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이 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李範奭,1900~1972)이 이 학교 졸업생이다. 그는 강무당 수석졸업(1919년)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1919년)을 지냈고 청산리대첩(1920년)에서 일선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1940년), 광복군의 참모장이 되었다(1945년). 

북한정권의 초대 인민군 총사령관과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인 최용건(崔庸健, 1900∼1976)이 이 학교 졸업생이다. 그는 강무당 졸업(1925년)후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였고 1936∼1939년 동북항일연합군 제7군단장, 제2로군 참모장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였다. 월남의 인민군총사령관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보 구엔 지압(武元甲,1911-2013)이 이 학교 졸업생이다. 그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1954년) 마침내 프랑스 식민지배를 종결지었다. 그는 미국군을 베트남에서 몰아냈으며(1973년)  남베트남을 함락시켰다(1975년).  

그밖에 한국인 출신으로서, 권기옥(權基玉, 여, 1903년-1988)은 이 학교 항공과 1기로 졸업하였고(1925년) 해방 후 한국 공군을 창건하는데 공헌했기에 ‘공군의 어머니’로 불린다. 김훈(金勛,1898-1936)은 공산당의 대장정에 참가하여 많은 군공을 쌓았다(이 칼럼 14회차 ‘잊혀진 사람 김훈’참조). 다수의 한국 청년들이 강무당에 입학하게 된 데는 임정요인 신규식(申圭植, 1879~1922)선생이 신해혁명 주도세력인 동맹회 인사들과 맺고 있던 개인적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학생의 입학을 지원해주었던 운남군벌 당계요(唐繼堯 1883~1927)에게는 독립운동을 후원한 공로로 대한민국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968년).

한국의 현대사는 동아시아의 현대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긴밀한 연결성은 민족의 숙원인 통일문제를 푸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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