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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42)  의순공주(義順公主) - 백성은 ‘족두리 묘’로 연민, 지배층은 배척

입력 : 2022-10-05 02:27:16
수정 : 2022-12-08 01:20:07

이해와 오해 (142)  

의순공주(義順公主) - 백성은 족두리 묘로 연민, 지배층은 배척

박종일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족두리 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이 무덤의 주인은 의순공주라고 한다. 의순공주는 청나라의 요구로 청의 왕족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평안도 정주에 이른 의순공주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며 강물에 몸을 던졌다. 사람들이 시신을 찾았으나 그녀가 썼던 족두리만 건질 수 있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싸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공주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희미해졌다. 그런데 마을에 안 좋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공주의 영혼을 달래주지 않아서 일어난 재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년 3월 초 천보산에서 공주를 위한 제사를 지낸 후 마을 사람들이 국수를 나누어 먹었다. 그랬더니 풍년이 들고 마을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이렇게 형성된 정주당(定州堂)놀이는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

전설에서는 의순공주(1635-1662, 본명 애숙愛淑)가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史實)에서 의순공주는 청왕조 순치제의 섭정왕 도르곤과 결혼하여 그의 정실부인이 되었다. 도르곤은 만주족이 중원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군사 전략가이자 대정치가였다. 그는청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기도 했다. 그가 상처하고 나서 조선의 공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조선에 압력을 가해왔으나 청을 오랑캐로 여기던 조선의 국왕(효종)과 왕족은 엄청난 혼처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자신의 딸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가난한 종친이었던 애숙의 아버지 이개윤이 딸을 내놓겠다고 나섰고 효종은 그녀를 입양하는 형식을 통해 공주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부인이 된 지 약 7개월 후인 165012월에 도르곤이 사냥 중에 사고로 사망하였다.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사후에 그의 부하 장수이자 자신 또한 왕족이었던 친왕 보로에게 재가하였지만 1년 만에 보로가 사망하여 다시 홀로 지냈다. 그 사이에 순치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죽은 도르곤을 역적으로 낙인찍었다. 16564, 의순공주의 친부 이개윤이 동지사로 북경에 왔다. 그는 청의 황제에게 의순공주를 조선으로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녀의 귀국에 앞서 청의 순치제가 보낸 칙서의 내용은 그녀가 과부가 되어.....부모 형제와 멀리 떨어졌으니 측은하게 여긴지 오래 되었는데 아비인 이개윤이 딸을 보고자 주청하니....함께 귀국시켜 친지와 살 수 있도록 조처하니 조선은 따르라는 것이다. 효종은 호조에 명을 내려 그녀가 죽을 때까지 매달 쌀을 보내게 하였다.

하지만 오랑캐에게 시집을 갔고 남편의 사후에 수절하지 않고 이내 재가까지 했던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시선은 곱지 못하였으며, 더 이상 정치적 가치도 사라진 그녀에 대한 조정의 태도도 돌변했다. 1656년 윤5,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의순공주를 조선으로 데려온 이개윤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개윤은 삭탈관작되어 성 밖으로 쫓겨났다. 또한 귀국한 의순공주의 칭호는 이개윤의 딸로 격하되었다. 현종실록에는 의순공주가 정식으로 공주로 봉호된 것이 아니며 공주로 일컬어졌을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당연히 공주의 예우도 받지 못하여 오히려 청에서 황족의 예우를 받았던 시절보다 처지가 나빠졌다. 청의 시선 때문인지 이개윤은 다시 임용되어 청으로 가는 사신으로 활동하였다. 영조 때 저술된 연려실기술에는 이개윤이 나라를 위해 딸을 자청해 보낸 것이 아니라 청국에서 보내주는 폐백을 탐냈기 때문이며(무늬 있는 비단 40필과 백은 1,000 냥을 보냈다는 중국 측 기록이 있다), 섭정왕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받아들였다가 소박하여 버리고 부하장수에게 시집보낸 것을 이개윤이 청에서 데려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였다고 쓰여 있다.

의순공주는 26살에 죽었다. 꽃다운 나이에 정복당한 약소왕국 여인으로서 약소국의 운명을 대신 살아낸 그녀에 대해 백성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족두리 묘를 만들어 기념하였으나 나라를 지켜내지도 못한 지배층은 그녀를 부정(不貞)한 여인으로 기록하였다.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저술가 박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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