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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강물에 새긴 이야기 ③ 금강산 가는 길(上)

입력 : 2015-06-11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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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과 윤휴, 임진강에서 놀다

 

 

양주를 출발해서 감악산을 보고 걷는다. 유군과는 입암에서 헤어져 송석우의 옛집을 찾았다. 옛집 벽에는 몇 해 전 써 준 기문이 미수 허목의 글과 함께 걸려있다. 일행을 간파령에서 다시 만났다. 썩은소를 건너 정창기의 집에서 잤다. 아침에 진수동 이참봉을 찾아가서 만나보았다. 군영동에 이르러 허미수 어른을 뵈었는데 초가에 온갖 화초가 가득했다. 늦게야 하직하고 징파도를 건너 옥계역에서 잤다.

 

윤휴의 금강상 기행 ‘풍악록’ 첫 장면이다. 풍악록의 시작은 산천유람기가 아니다. 유람을 떠나기 위해 동행을 만나는 과정이다. 일행은 윤휴를 포함해서 넷. 외삼촌 김경과는 서울서 함께 출발했고 도중에 유군 유광선을 만났다. 그리고 다른 동행인 연천의 정창기를 만나기 위해 임진강을 건넌다. 그에 앞서 감악산 아래 살다가 돌아간 학자 송석우의 집을 들러 조문한다. 정창기를 만난 뒤에도 바로 출발하지 않는다. 진수동 참봉 이언무에게 들러 그의 아들을 데리고 허목의 초당으로 간다. 일행은 섬돌 위 일월석을 구경한다. 허목은 떠나는 정표로 광풍제월, 낙천안토, 수명안분 열두 자를 써 준다. 에둘러 돌아온 길에 대해 김경과 유광선은 산 속 신선늙은이를 만나 봤으니 헛걸음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둘은 허목을 이때 첫 대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윤휴를 비롯한 동류들의 만남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미수 허목이 가운데 있었고 만나는 장소는 임진강이었다.

 

“금상 4년(1663년, 현종4년) 봄, 윤희중(윤휴)이 송 장로(송석우)와 함께 녹봉의 초라한 거처로 나를 찾아왔다. 돌아갈 때는 진동 이경구(이언무)에게 들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저녁 앙암에 이르렀다. 앙암은 가파른 절벽이 강 옆에 우뚝 서서 물속에 비친 모습과 더불어 한 쌍의 돌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다.” 아미산 아래 임진강인 미강을 찾아 놀던 허목의 글이다. 4년 뒤 가을에는 웅연에서 논다. 이때는 웅연주인 이진무를 따라 신비스러운 석문 글씨를 본 다음 배를 띄우고 강물을 거슬러 장경대를 찾는다. 멀리 고랑포 앞 호로탄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10여인이 배를 타고 몰려가서는 기이한 바위 아래 ‘괘암’이란 글자를 새겨놓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 글씨는 자장리 바위에 지금도 남아있다.

 

 

허목가 살던 곳은 연천의 강서리다. 임진강이 크게 휘돌아 나가는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미수는 여기에 초당을 짓고 십청원, 괴석원 등의 정원을 꾸미고 살았다. 시골에서 할 일은 없고 흥미를 붙인 것이 열 가지가 있다며 산새들의 지저귐, 산비탈의 밤안개, 숲 너머 밥 짓는 연기 등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강서리는 군사지역인 민통선 안쪽이다. 허목의 집은 사라지고 없지만 옛집을 알리는 ‘은거당’이란 표석이 있어서 터만은 알 수 있다.

 

은거당은 숙종이 노신 허목에게 직접 지어준 집이다. 허목은 은혜를 입고 거처한다는 뜻으로 은거당이란 당호를 붙였다. 임금이 신하에게 직접 지어준 집은 조선시대 내내 세 차례에 불과했다고 한다. 은거당은 19세기 화가 허련의 십청원 그림에 모습이 남아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최근에 임금이 지은 집 하나가 가까운 임진강변에 새로 생겼다. 허목의 정원처럼 온갖 화초와 괴석과 조형물이 가득한 곳이다. 사라진 허목의 집이 이런 모양이었을까? 이름은 시대를 반영해서 ‘은거당’ 같은 구식이 아니라 ‘허브빌리지’란 달달한 이름이다. 다만 새로운 집은 주고받음이 떳떳하고 은혜로웠던 은거당과 달리 대통령의 비자금을 통해 얻은 것이다. 이 집은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에 따라 압류돼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강을 낀 절벽, 물결은 아득하고 물가는 먼데 기러기가 날아서 모여들었다. 이에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면서 취하도록 마시고 즐거워했다.(허목의 미강범주기 중)”

 

이들은 허목의 말처럼 시골에서 할 일은 없고 그저 모여 놀기만 했던 것일까? 풍악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자. 글쓴이 윤휴. 아버지는 광해군에 동조한 북인당파로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고 병자호란의 치욕까지 당하자 울음을 토하며 벼슬을 포기한 사람이다. 유광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 역모사건으로 처형됐다. 출사의 길은 막히고 어쩔 수 없이 공부에만 힘쓴 사람이다. 김경. 비주류인 남인이다. 나중에 윤휴의 북벌계획을 도우며 정치적 부침을 함께한다. 이언무. 아버지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화의하는 일에 동조했다는 의심과 비난을 받았다. 재능은 있으나 향리에 묻혀 살았다. 감악산 아래 송석우는 재야의 원로였고 웅연주인 이진무는 평생토록 웅연에서 낚시질하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정창기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허목의 제자이거나 친인척들이다. 이들은 정쟁을 피해 향리에 거처하는 사람들이거나 비판세력으로 출사를 각오한 당대의 야당이었다.

 

 

이재석(DMZ 생태평화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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