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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51] 우리 곁의 조선족(3)

입력 : 2016-11-04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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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의 조선족(3)
 
한일합방 이후로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에서 철저한 무단통치를 벌였고 따라서 국내에서의 반일무장투쟁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 때에 연변 조선족 사회는 항일 무장투쟁의 기반이 되었다. 영토적으로는 중국의 한부분인 (조선-중국) 국경지역의 조선족 집거지역에서는 많은 무장조직이 생겨나 조선 경내의 일본 통치기구를 공격하였다. 조선족사회는 이런 군사행동의 물질적 인적 자원을 제공하였기에 일본 군경의 탄압과 토벌의 대상이 되어 많은 희생을 치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로부터 영향을 받아 3월 13일에  용정에서 반일 대중시위가 일어나 4월 22일까지 연변 각지에서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이를 군사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훈춘사건’(일본이 중국 비적을 교사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공격하게 한 사건)을 일으켜 일본군대를 파견한다. 
 
유명한 ‘봉오동전투’는 이때 일어났다. 1920년 6월에 홍범도의 지휘 밑에 북로독군부, 신민단 등 반일 무장부대들이 연합하여 봉오동에서 일본군 장교 야스가와의 ‘추격대’를 섬멸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조선족 반일무장부대들이 중국 경내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킨 첫 번째 전투로서 항일무장투쟁의 한 획을 그었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과 반격으로서 ‘경신년대토벌’을 벌인다. 1920년(음력으로 경신庚申년) 10월에 4개 사단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족 거주지역에 대한 ‘삼광작전“(남김없이 죽이고, 불사르고, 빼앗는다)을 펼쳤다.
 
일본군대는 조선족 마을을 지나가면서 가옥을 모조리 불태우고 사람은 보이는 대로 죽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훈춘, 연길, 화룡, 왕청 네 개 현에서 조선족 주민 3.500여명이 살해되고 5,058명이 체포되었으며 가옥 2,500여 채와 사립학교 30여개소가 불태워졌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 홍범도가 지휘하는 반일무장부대가 경신대토벌에 동원된 일본군과 화룡현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그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청산리에서 벌어졌다. 이때의 전투에서 일본군 기병 연대장 가노를 포함하여 일본군 수백 명이 전사하였다. 봉오동-청산리전투는 무장 독립투쟁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1930년대로 들어와 일본은 만주국이란 괴뢰정권을 세워 중국 동북지역을 사실상 직접지배하게 된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선족의 항일무장투쟁도 중.일 전쟁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어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유격투쟁의 형태로 전개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족 무장 세력은 일정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조선 경내에 수시로 진출하였는데 김일성부대는 그 중의 일부였다.
 
중국 조선족 사회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한.중간에 국교가 열리기까지 약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냉전시대의 이념 싸움 때문에 그들과 우리는 단절되었다가 이제 다시 (문화적, 경제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곁의 조선족은 “이주노동자”나 “중국내 소수민족”을 넘어 우리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51 창간2주년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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