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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⑧ 종계변무

입력 : 2016-11-04 11:04:00
수정 : 0000-00-00 00:00:00

 

글 솜씨로 해결한 200년 동안 골칫거리 외교, 종계변무 

 
금산리 마을에서 빠져나와 낙하 사거리에 이르러 우회전을 한다. LG로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아 좌측 마을로 들어가면 조선 전기 이름난 가문의 묘역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장수 황씨 가문이다. 이 묘역에는 청백리로 이름난 방촌 황희의 묘, 그의 셋째 아들 황수신의 묘, 황희의 7세손 황정욱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황희는 파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인물이고, 그의 아들 또한 영의정을 지냈으니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황정욱은 도대체 누굴까?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활동할 무렵 중국의 명나라에 잘못된 정보가 흘러들어갔다. 이성계의 반대편에 서 있던 세력이 그를 타도하려고 음해를 한 것이다.
“황제 폐하, 고려의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는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공민왕은 물론 여러 왕을 시해한 흉악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중국 태조실록에 그대로 실리게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조선을 건국하였고,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이이임의 아들 이성계는 보아라. 우리 명나라의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는 그대의 백성들을 압송하라.”
“뭐시라? 내가 왜 이인임의 아들이야.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이성계에게는 정말로 모욕적인 내용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정적이던 이인임이 아버지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이성계는 이를 바로잡고자 사신을 보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재상인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할 정도로 조선과 명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명은 조선을 의심하고 있었다.


▲ 황정욱 묘와 신도비(사진: 파주시청,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 22)

 
명이 200년 동안 종계를 고치지 않다
태종은 즉위한 뒤 적극적으로 사대 정책을 취하면서 명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였다. 더불어 종계를 바로잡고자 사신도 파견하였다.
“황제 폐하, 조선을 세운 저희 부친은 이인임의 아들이 아니옵니다. 제 조부는 이자춘이고, 증조는 이춘이고, 고조는 이행리이고, 현조는 이안사고, …… 이인임은 나쁜 놈으로 저희 집안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는 명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라면서 고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심지어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에까지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실리게 되었다.
그 후 조선의 국왕들은 명과의 외교에 있어서 ‘왕실의 계보에 관한 무고를 바로잡는 문제(종계변무)’를 매우 중시했다. 반면, 명은 종계변무의 문제를 들어주지 않으면서 조선을 이용하는 외교 카드로 활용하였다.
“이성계의 종계를 바로잡아 줄 터이니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군대 좀 보내라 해.”
명나라 입장에서는 사실을 바로잡기만 하면 되는 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반면, 목이 마른 것은 조선이었다. 이를 알고 명나라는 종계변무의 외교 카드를 자그마치 200년 동안 이용하였다.
 
황정욱이 종계변무를 해결하다
조선이 안고 있던 골칫거리 외교인 종계변무는 선조 때 가서 해결되었다. 선조는 황정욱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종계변무를 해결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 일렀다. 황정욱은 명의 신하들과 접촉하여 황제에게 글을 올릴 수 있게 사정하여 글을 지어 바쳤다. 황정욱의 글을 읽은 명나라 관리는 감탄했다.
“좋은 글이로세. 어찌 이리 아름다운가?”
이리하여 선조 17년(1584)에 이성계의 종계가 바로잡혔고, 곧 대명회전도 수정되었다. 황정욱의 졸기에 “문장이 고상하고 묘한데, 스스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아니하여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황정욱의 글 솜씨가 종계변무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 글을 쓰면서 현실과 비교를 해 본다. 명나라는 단순한 사실 오류를 200년 동안의 외교 카드로 활용했다. 현 정부는 위안부 외교 카드를 미 프로야구 선수 연봉도 안 되는 100억 원에 합의하였다. 금액을 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해 없으시길. 100억 원이 아니라 적어도 100년 동안 쓸 수 있는 외교 카드였다.
 
글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51 창간2주년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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