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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⑩ 황희 선생 묘

입력 : 2016-11-28 1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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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황희 정승 

●문화재명: 황희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34호) 


▲황희 선생 묘: 봉분 앞 2단의 석축이 의자의 팔걸이처럼 양쪽 앞으로 뻗어 나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황수신 묘를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면 바로 황희의 묘가 있다. 파주 사람이라면, 아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명재상 황희의 묘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황희’ 하면 ‘정승’, ‘정승’ 하면 ‘황희’를 떠올릴 정도로, 황희는 이름 난 정승(재상)이다. 사실 황희는 반구정을 답사할 때 소개하려고 아껴 둔 역사 인물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의 아들만 소개하고 다른 곳으로 넘어 갈 수 없기에 황희가 잠들어 있는 곳까지 가 보자.

 

성균관 말단직, 벼슬을 시작하다

황희는 고려 우왕 2년(1376) 14세 때 부모의 덕택으로 음서로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곧 사마시와 진사시는 물론 대과에 급제함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고려에서의 벼슬은 짧았다. 대과 급제 2년 뒤인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황희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벼슬에 나아갔다. 성균관의 말단직인 성균관 학관이었다.

 

“여봐라, 황희가 경학에 밝다고 하니 세자를 보필하는 정자의 벼슬을 겸하게 하라.”

 

그 후 황희는 경력을 쌓아 가면서 높은 벼슬까지 올라갔다. 한편, 고려가 멸망한 뒤 황희가 개성 인근의 두문동에 들어가 조선 건국을 반대하였다고 하지만 공식적인 자료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황희가 개국 공신이 아니라는 점, 조선 건국 2년 뒤에 벼슬을 다시 시작한다는 점에서 고려와 조선이 교체되면서 일정 기간 은둔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양녕대군 두둔하다가 유배가다

태종 18년(1418) 황희가 판한성부사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어김없이 여자 문제를 일으켰다. ‘어리’라고 하는 남의 첩과 가까이 지내며 임신까지 시켰던 것이다.

 

“전하, 만세의 대계를 위해 세자를 폐하시옵소서. 군왕의 자질이 없사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아직 어리기에 일어난 일로, 큰 과실이 아니옵니다.”

 

많은 신하들이 세자를 폐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황희는 두둔하였다. 그러나 충녕(훗날 세종)에게 마음이 가 있던 태종은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폐하였다. 이 일로 황희는 태종의 눈 밖에 났고 지금의 교하로 유배를 왔다가 다시 남원으로 옮겨 갔다.

 

세종의 시험을 통과하다

충녕에게 군왕의 자리를 내 주고 상왕의 자리에 오른 태종은 죽기 전에 황희를 다시 부르게 했다.

 

“주상, 황희는 능력도 있고 믿을 만한 신하예요. 다시 불러들이세요.”

“상왕 마마, 그러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을 반대했던 인물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황희를 흉년이 들어서 많은 백성이 허덕이던 강원도로 보냈다. 황희는 강원도관찰사로서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진력했다.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게 했고, 공물을 감면하고 식량과 종자를 나누어 줌으로써 굶주린 백성을 구해냈다. 지금도 삼척에는 ‘소공대’라 하여 황희의 애민 정신을 기리는 유적이 남아 있다. 황희의 진면목을 알아본 세종은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의 벼슬을 내렸다. 황희가 64세가 되던 해의 일이다.

 

영의정만 18년, 87세에 은퇴

황희는 우의정에서 곧 좌의정의 승진하였다. 좌의정을 역임하던 중에 실수를 저지른 관리를 두둔하다가 탄핵을 당하였다. 이때 탄핵을 받아 반구정이 있는 곳으로 낙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세종은 69세의 노인 황희에게 영의정을 제수하며 다시 불러들였다(세종 13년 1431). 가까이 두고 싶은 인재였음을 증명한다. 이때부터 18년 동안 영의정으로서 문물제도를 정비하면서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전하, 소인이 나이가 많아 이제는 물러나야겠습니다.”

“그대가 없으면 이 나라는 어찌 하란 말이오? 아니 되오.”

 

황희는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반려되었고, 87세가 되어서야 은퇴가 받아들여졌다. 그 후에도 나라에 일이 생기면 황희에게 자문하였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국정을 살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세종 때를 문화 창달의 시기로 파악한다. 농학, 천문학, 과학, 인쇄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세종의 한글 창제로 고유 문자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황희와 같은 명재상이 세종을 보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희에게도 소위 말하는 흑역사가 있었으니 반구정 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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