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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㉕ 자기(瓷器)이야기

입력 : 2015-10-13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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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瓷器)이야기

 

유럽에 자기의 존재를 알린 사람은 마르코 폴로(1254?-1324)였다. 그는 당시까지 진주질(珍珠質)을 일컫는 porcella란 단어를 자기 이름에 붙였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오랫동안 진주조개 껍질로 자기를 만드는 줄 알았다.

 

1610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첫 번째 차 상자를 암스테르담 항구에 내려놓은 뒤로 차는 유럽 상류사회의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유럽에서 차나무가 자라지 않듯이 유럽의 유리공방은 자기를 만들 줄 몰랐다. 동인도회사의 상선이 중국의 광주(廣州), 경덕진(景德鎭), 남경(南京)에서 중국 자기를 사들여 유럽으로 가져왔다. 자기는 왕궁과 제후의 저택에 진열되었고 국가 간의 예물이자 공주가 결혼 할 때 혼수품이었다.

 

작센의 제후 "힘센 아우구스투스(Augustus the Strong)"는 셀 수 없이 많은 자기 소장품과 최소한 350 명의 사생아를 남겨놓고 죽은 인물이다. 18세기 초에는 순백색의 자기를 구워내는 것이나 보통의 금속을 녹여 번쩍이는 황금을 만드는 것이나 둘 다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힘센 아우구스투스"는 저명한 연금술사 보트게르(J. F. Bottger)를 초빙해서 금이든 자기든 구워달라고 부탁했다. 보트게르는 못 쓰는 구리 조각과 녹 쓴 쇠 더미를 쌓아놓고 몇 달 동안 그럴듯하게 구워댔으나 사태가 마음 같지 않자 달아날 준비를 했다. 국왕의 병사들이 그를 붙잡아 감옥에 넣었다. 그가 작센의 감옥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어떻게 반성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그는 감옥에서 나오면서 마지막 기회를 잡아 연금술사에서 도자기 장인으로 변신했다. 1708년, 그는 마침내 유럽 최초의 광택이 없는 순백색 경질 자기를 만들어냈다. 1710년, "힘센 아우구스투스"는 마이센에 왕립 도자기 공장을 세웠다. 1719년, 작센 왕립 도자기공장의 장인 두 사람-훙거(C. K. Hunger), 슈톨첼(S. Stolzel)-이 비엔나로 달아났고 그곳에도 오스트리아 첫 번째의 도자기 공장이 등장했다. 다음 해에 훙거는 다시 베네치아로 달아나 그곳에 도자기 공장을 세웠다. 그는 유럽 도자기 기술의 사도였다. 1737년, 그는 이번에는 코펜하겐으로 달아났고 덴마크 왕립 도자기 공장이 세워졌다. 1743년에는 페테르부르크가 그를 맞아들였다. 코펜하겐과 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활약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 자신의 기술 때문이 아니라 현지의 흙이 문제였다.

 

독일의 마이센은 유럽 도자기 예술의 성지가 되었다.

 

 

 

 

박 종 일 ( 지혜의 숲 권독사 )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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