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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66] 잊혀진 사람(2), 무정(武亭)

입력 : 2017-06-16 00:03:00
수정 : 0000-00-00 00:00:00

 
잊혀진 사람(2), 무정(武亭)
 

무정의 본명은 김무정이다. 190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서울에서 고학하며 학교를 다녔다. 14살이던 1919년에 3.1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명문 중앙고보에 입학했고 이 학교를 다니며 사회주의자인 몽양 여운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3년(18세)에 독립운동에 매진할 생각으로 중앙고보를 자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문화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군벌이 세운 군사학교 동북강무당에 들어가 포병과를 마쳤다. 군벌 군대에서 군벌들 간의 전쟁에 참가하여 뛰어난 공을 세우고 22세에 포병 중령이 되었다. 1925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당시 당원 수는 천 명을 넘지 못했다. 군벌 군대에서 나와 장개석의 북벌군에 들어갔다. 1927년 장개석이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져 도피했다. 무한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장개석 독재를 반대하는 학생시위 덕분에 풀려나 상해로 갔다. 1929년 상해노동자 폭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외국인이면서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지도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폭동이 실패로 끝난 후 홍콩을 거쳐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팽덕회 휘하의 홍군에 들어갔다. 그는 홍군에서 포병부대를 창설했다.

 



1934~1936년 사이에 진행된 홍군의 장정 과정에서 그는 포병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이었고 누산관 전투에서 중요한 공을 세웠다. 장정 과정에서 무정의 역할은 헤리슨 솔즈베리가 쓴 ‘장정비화’에도 기록되어 있다. 장정을 시작할 때 홍군 내에는 조선인 혁명가 30여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장정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그와 양림(楊林)뿐이었다. 그는 뛰어난 전공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마지막으로는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는데 정치적 배경이 없는 외국인으로서는 파격적인 출세였다.

 

연안 시절에는 조선 출신 청년들을 (조선의용대 중심으로) 불러 모아 군사훈련을 시켜 일본군과 싸웠다. 해방 후 귀국하여 조선노동당 제2서기로 선출되었으며, 북한 인민군 포병부대를 창설했고(포병총사령관) 6.25전쟁에도 참전했다(인민군 제2군단장, 수도방위사령관). 전쟁 중에 (장정시기에 얻은 악성 위궤양이 재발하여) 팽덕회의 주선으로 1952년 중국으로 후송되었다가 조국에서 죽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북한으로 옮겨진 후 얼마 안되어 1952년 10월에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6.25 종전 후 북한에서는 김일성 단일 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조선의용대가 주축인) 연안파가 숙청되면서 그의 존재도 포병 전문가로 축소되었다. 남한에서는 이념 때문에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한 시절 조국 독립의 큰 뜻을 품고 대륙과 한 반도를 누비며 신명을 바쳤던 혁명가들 가운데서 조국의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다 같이 지워버린 인물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이 칼럼 제14회(2015. 5. 15) ‘잊혀진 사람, 김훈’에서 소개한 ‘김훈’이 바로 ‘양림’이다.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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