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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 홍랑의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

입력 : 2014-11-20 16:05:00
수정 : 0000-00-00 00:00:00

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홍랑의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

교하열병합발전소 앞 삼거리에 작은 교회 뒤쪽에 있는 밭들 사이로 ‘시인 홍랑의 묘’를 볼 수 있다. 홍랑의 묘 위 에는 사대부의 묘가 있다.

첫 번째 만남과 이별

홍랑은 조선 중기 함경도 홍원의 관기였다. 그녀는 시를 잘 지었으며 당시의 이름난 시인인 최경창을 흠모하고 있었다. 홍랑은 1573년 북평사에 임명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가던 최경창을 만나 곧 사랑에 빠졌다. 최경창도 홍랑을 아껴 자신의 부임지인 종성까지 데리고 갔다. 홍랑은 최경창을 위해 음식 장만과 빨래, 청소, 바느질은 물론 아내 역할을 하며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최경창이 한양으로 벼슬을 옮겨 감에 따라 둘은 생이별을 해야 했다. 홍랑은 슬픔을 간직한 채 최경창을 배웅하다가 이별의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최경창은 홍랑이 보낸 시를 받아 보았다. 해가 저물어 어둑해졌고 쓸쓸히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묏버들처럼 하찮은 신분이지만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홍랑의 애절한 정한이 담겨 있다.

 

두 번째 만남과 이별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온 뒤 이듬해 봄부터 몸져누웠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즉시 보따리를 싸서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으로 들어왔다. 홍랑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함에 따라 최경창은 가을에 병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당시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주민들이 고장을 떠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하였다. 더구나 천한 관기가 이를 어기고 한양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결국 홍랑 때문에 최경창은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고, 홍랑은 함경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최경창이 홍랑에게 이별의 시를 전했다.

물끄러미 마주보며 고운 난초를 건네노라.

이제 하늘 끝으로 떠나면 언제나 돌아올까?

함관령의 옛 노래는 부르지 말라.

 

지금까지도 구름과 비에 푸른 산이 어둡나니.

최경창은 이전에 홍랑이 보낸 이별의 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최경창은 홍랑이 보낸 시를 ‘함관령의 옛 노래’라고 이름하였다. 최경창에게 있어 홍랑은 묏버들이 아니라 난초였다. 남자의 사랑도 여자의 사랑만큼이나 절절한 것이다. 홍랑은 최경창이 건네준 시를 받아 들고 홀로 함경도로 돌아갔다. 그것이 살아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임에 대한 처절한 사랑

최경창은 다시 복직되어 종성부사로 근무하다가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종성의 객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1583). 홍랑은 최경창의 묘소가 마련된 파주로 내려와 무덤 앞에 움막을 지었다. 정실부인도 아닌 한낱 기생 따위가 자신을 사랑해 준 사대부를 위해 시묘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홍랑은 치장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고의로 훼손하여 추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남정네의 접근을 막은 것이다. 홍랑의 시묘살이는 3년이 아니라 9년 동안 이어졌다.

 

임과의 영원한 만남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홍랑은 최경창의 시와 유품을 챙기서 난을 피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최경창의 시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홍랑을 시도 알고 사랑도 알고 절개도 아는 한 인간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후손들은 홍랑을 집안사람으로 받아들였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 묘 아래에 홍랑의 묘를 조성하였다. 비록 죽었지만 홍랑과 최경창은 함께 있게 되었다. ‘시인’ 또는 ‘홍랑 할머니’라고 부른다.

파주 시민 모두 홍랑처럼 뜨겁고 처절하게 사랑하며 살아가길...

정헌호 역사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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