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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6> 5. 두 서울 사이, 길목 (4) 방랑의 시작, 김시습의 첫 걸음

입력 : 2020-07-01 09:08:34
수정 : 2020-07-02 00:51:39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6>

 

5. 두 서울 사이, 길목

(4) 방랑의 시작, 김시습의 첫 걸음

 

▲ 낙하 건너 개성으로 향하는 길

 

남효온이 울분을 삼키며 방랑하던 그때, 그 훨씬 전부터 이미 온 나라를 떠돌던 사람이 있었다. 황정경을 잘못 읽어 인간 세상에 귀양 왔다는 남효온에게서 그 경전을 빌려간 사람, 사제 간인 듯, 벗인 듯 세상 밖에서 서로 어울리던 사람, 천재의 광기로 시대와 맞섰던 김시습이다. 한 발 앞선 이여서일까? 남효온의 걸음에 유배자의 그림자가 드리운 반면, 김시습에게선 그마저 초월한 소풍 온 자의 경쾌함이 느껴진다.

 

“강물은 서쪽 바다를 향해 넘실넘실 흐르는데/ 버들은 바람 불어 파도 일자 언덕을 치네./ 묻노니 정처 없는 발길은 어디에 매어 볼까?/ 물가 흰모래 둔덕엔 뭇 풀만 무성하네.// 삿대 미는 뱃사공의 한쪽 어깨는 높아/ 버들 휘늘어진 낚시터 물은 삿대 반쯤 깊이라/ 남으로 가고 북에서 오는 사람 끊임이 없는데/ 물안개 낀 수면위로 가벼운 거룻배를 보내 주네(김시습. 「낙하를 건너며」)”

 

김시습의 관서여행 첫 부분. 시는 낙하나루를 건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여행이 상쾌한 나들이가 아니라 정처 없는 발길임을 밝히고 있다. 말보다 글을 먼저 알았다는, 다섯 살에 임금 앞에 불려나가 시를 짓고 호기를 부렸다는 천재의 삶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함께 광인의 삶으로 변해버린다. 왕위찬탈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방문을 닫아걸고 사흘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크게 통곡한 다음 책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는 그대로 방랑길에 오른다. 유교적 삶의 가치체계가 무너진 혼란 속의 방황이었다.

3년의 방황 끝인 1458년, 김시습은 충남 동학사에서 단종의 제를 올리는 것으로 방황을 마무리한다. 그리고는 “세상에 태어나 도를 행할 수 없다면 자신만이라도 수양함이 옳다”고 여겨 승려가 되어 떠돌기 시작한다.

김시습은 방랑의 삶 첫발을 낙하나루에서 떼고 있다. 혼란의 한 매듭을 지은 뒤라서 일까? 그의 발걸음에는 방황보다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이 묻어난다. 그는 개성을 향했다. 그리고 첫 걸음에 세상에서 벗어나 소요하는 삶을 못 박아 선언한다.

 

“푸른 산에 날 저물어 나는 새도 깃드는데/ 흰 구름 숲속으로 떠나가는 나그네여./ 굳건할 손 나의 생애/ 거뜬할 손 나의 행장/ 멀리 들뜬 세상 벗어났구나./ 이제부턴 명승지나 찾아가련다/ 만리 강산에 내 마음 내키는 대로.(김시습. 「성거산에 오르면서」 일부)”

 

▲ 민통선으로 막힌 낙하 나루

 

그 후 황해도와 평양, 청천강, 안주, 영변 등을 둘러본 뒤 겨울에 개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봄이 오자 다시금 훌쩍 길을 떠난다. 포천, 김화를 거쳐 금강산을 찾는다. 서울 동쪽으로 돌아오지만 그도 잠시 내처 원주로 향하고 오대산을 넘어 강릉으로 간다. 거처가 따로 없었다. 발길이 멈춘 곳이 집이었다. 광기와 방황의 시간을 접은 뒤 이어진 방랑인의 삶은 이렇게 쭉 이어졌다.

관서여행을 마친 뒤 이어진 관동여행도 임진강에서 시작한다. 이번엔 임진나루다. 김시습은 개성 쪽에서 임진나루를 건넌다.

 

“버들 언덕의 강정이 작긴 하지만/ 올라오니 맑은 흥이 많기만 하다./ 물결 소린 저절로 출렁이는데/ 사람의 그림자도 춤을 추누나.(김시습. 「임진강 정자에 올라」 일부)”

 

강정은 화석정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유호인 등이 휘파람을 불고 지나간 그곳, 김시습도 현판을 걸기 전의 화석정을 지난다. 그 뒤로 우리 산천에서 그의 발자취가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의 방랑은 길가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정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다녀간 곳곳이 시편으로 남아 그곳을 빛냈고, 이어 금오신화라는 걸출한 작품으로 갈무리된다. 첫 발자국이 임진강에 찍혀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임진강은 이 특별한 신화의 주요배경으로 등장한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 저자

 

#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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