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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17> 다시 읽는 국민교육헌장

입력 : 2020-06-25 10:48:44
수정 : 2020-06-25 10:50:44

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17> 다시 읽는 국민교육헌장

 

작가 전종호

 

[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되겠습니다] 저자

 

 

 

국민교육헌장은 국민학교를 다녔던 7080세대에게는 애증과 추억의 대상이다. 누구는 이른바 조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자긍심과 함께 아련한 향수를 느끼고, 또 누군가는 군사정권 시절 우민화 정책의 산물로 불쾌한 기억을 소환한다. 헌장을 제대로 외우지 못해 청소를 하거나 매를 맞거나 나머지 공부를 했던 사람도 있고, 반대로 너무 잘 외워서 구령대에 올라 전교생 앞에서 암송하고 상을 받았던 자랑스러운 기억을 가진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암기한 국민교육헌장은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심어주며 어린 영혼들의 자양분이 되어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하였다.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은 총 393자 초··종장으로 구성되어, 한국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념과 근본목표를 밝힌 교육지표이자 정치교육 지침서다. 초장은 민족의 긍지를 바탕으로 국가의 자주 독립성과 인류공영에 기여할 수 있는 한국인의 결의를 다짐하는 서론이다. 중장은 본론으로 국민교육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로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개인윤리, 사회윤리, 국민윤리의 순으로 국민 각인이 실천해야 할 규범과 덕목을 명시하였다.

먼저 개인윤리로,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을 기반으로 하여 창의력, 개척정신, 소질 개발, 주체적인 정신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윤리로, 개인보다는 공익과 질서, 협동정신과 고도 산업사회의 능률성과 효율적인 생활인의 자세와 상부상조의 전통을 강조한다. 셋째, 국민윤리로, 애국심과 국가와의 관계,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의 개인의 책임감과 국가건설을 위한 개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봉사, 국가발전을 위한 개인의 헌신을 강조하고 있다. 종장은 결론 부분으로, 국가의 지향과 목표로서, 분단된 조국 통일을 위한 공산주의의 극복과, 후손에게 물려줄 빛나는 유산을 위한 국민 각자의 신념과 긍지를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다. 지금 읽어도 입에 척척 감길 만큼 우리의 영혼과 정신에 체화되어 있는 단순, 간결, 명쾌한 압축형 명 논리 명문장이다. 국민의 역사적 사명, 국민의 윤리, 국가의 지향과 목표가 서론, 본론, 결론을 통해 연결되고, ··종장 안에서 각각 개인-사회-국가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논리 전개가 명료하여, 과연 당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교육학자, 문장가의 작품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당시 권오병 장관의 지휘 아래 문교부 내부의 준비 작업과, 박종홍, 이은상, 유형진, 정범모 등 26인의 헌장초안 위원들의 기초 작업과, 임영신, 김옥길 등 교육계, 이병도, 박종화 등 문화계, 한경직, 이청담, 김수환 등 종교계, 장기영, 최석채 등 언론계, 기타 경제계, 정계, 정부 대표를 망라한 50여 명의 심의의원들의 마무리 작업을 거쳐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1968125일 박정희 대통령이 전 국민에게 선포하였다.

선포된 이후 국민교육헌장을 실천하기 위하여, 1)헌장이념 구현을 기본방향으로 하는 교육과정 개편 2)교과서 내용 재검토와 개편 3)모든 장학자료를 통한 구체적 방법 제시 4)헌장의 규범에 입각한 학생들의 일상생활지도 등의 강력한 조치가 시행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은 모든 교과서의 첫머리에 인쇄되었고 애국조회와 모든 행사에 낭독되었으며 헌장 선포일을 기념하고 기념식에서는 헌장 실행과 관련된 각종 포상이 이루어졌다.

 

이제 민주화 시대에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읽는다. 그때 정권은 무슨 이유로 헌장을 만들었으며, 왜 그렇게 학생들에게 무지막지하게 암기시키고 행사마다 복창시켜 국민을 의식화 했을까? 수단을 가리지 않고 헌장을 암기시킨 내면화의 결과는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헌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국가주의가 압도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한 공동체 가 아니라 국가 발전에 중점을 두고 여기에 기여하는 개인의 심성과 태도를 강조하며 국민을 동원한다. “국민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둘째, 물질주의 또는 경제주의를 강조한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며 정신을 제2경제로 규정한다. 셋째, 냉전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 된다.” 개인의 자유, 존엄, 인권 등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내용의 언급과 강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국민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현대 민주주의의 지향과 추세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하는 박종홍이나 발전교육론자 정범모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는 교육의 도구적 관점으로 후일 우리교육의 고질적 문제로 자리 잡은 입시교육으로 이어진다.

 

 

 

▲ 1902년 일본의 한 소학교(초등학교)에서 교육칙어를 봉독하는 모습.(출처 : 경향신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으로 시작하여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은 메이지 유신을 위하여 황국신민의 심성과 자세를 강조하고 교육을 국가동원체제의 하위 기능으로 보는 일본의 <교육칙어>와 발상과 구조가 비슷하다. 왕정 치하가 아니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의 교육지표요, 국회를 통과한 헌장에 대통령 박정희를 명토 박은 걸 보면 위임 받은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제왕적이고 독재적인 권력 관점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의 추진 목적은 헌장의 내용 보다는 기념일마다 반복되는 박정희의 발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은 조국 근대화의 물량적 성장을 보완·촉진해 나갈 정신적 지표이고 경제발전을 위한 국민정신 개조를 위한 것이었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10월 유신 정신이 국민교육헌장의 이념과 그 기조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3선 개헌과 유신 등 정권유지의 발판으로 교육을 장악한 것이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을 보급하고 교육한 방식을 살펴보면 당시 대통령과 정권의 교육에 대한 시각을 알 수 있다. 대통령과 정권의 관심은 교육이 아니라 국민의 교화에 있었으며 교육을 내면의 계발이 아니라 외부의 가치관과 지식을 주입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강압, 주입, 교화를 금지하고, 논쟁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학생의 성숙과 자주적 판단 형성이 원칙인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원칙에 비춰보면 국민교육헌장의 교육관과 이의 교육 방식은 감히 교육이라고 할 수도 없다. 국민교육헌장이 모든 국민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1978, 국민교육헌장의 시행과 교육에 대한 지식인들의 조직적 반발이 터졌다. <우리교육지표 사건>이다. 국민교육헌장이 우리의 교육지표가 될 수 없는 이유와 헌장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1.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 2. 학원의 민주화와 인간화 3.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 배제 4. 3·1정신과 4·19정신의 계승과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광주에서 발생한 <우리교육지표 사건>은 독재정권에 의해 곧 진압되었지만, 2년 뒤에 일어난 광주민주화 운동의 정신적인 밑바탕이 되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정신이 되었다.

어린 영혼들에게 내면화된 국민교육헌장의 정신은 기성세대의 머릿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현재진행형의 신념체계다. 단순한 향수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태극기 부대의 과격한 신념과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민주정부의 정책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선량한 국민을 여전히 국가지배체제에 동원하기도 한다. 국가발전을 위한 일사불란한 교육과 질서관은 경제개발의 중요 정책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그 후 우리 사회의 정치와 교육 등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었다. 한 나라의 정책과 제도를 시공간 특수성의 고려 없이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교육기준과 가치관에 의해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이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된 교육관과 정책 등은 인류의 보편적 이성과 기준, 가치관에 의해서 검증되고 개선함으로써 과오를 시정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시민의 자유와 존엄성의 평등의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와 교육을 재개념화하는 일은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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