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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5> 5. 두 서울 사이, 길목 (3) 또 다른 여행, 세상에 귀양 온 방랑인 남효온

입력 : 2020-06-05 09:32:43
수정 : 2020-06-15 09:31:49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5>

 

5. 두 서울 사이, 길목

(3) 또 다른 여행, 세상에 귀양 온 방랑인 남효온

 

아침에 청학동을 떠나와서/ 저물 무렵 장단수를 건넜네/ 바위벼랑 그림 병풍 펼쳐서/ 이십 리나 두루 에워쌌도다/ 단풍은 바위 사이에 밝게 빛나고/ 물가 풀은 추위에도 죽지 않았네/ 저문 강 물결 위로 기러기 울 때/ 나그네 찾아와서 행장을 머무네(남효온. 기행 24첫 수)”

여기 또 한 사람의 길손이 개성을 향해 가고 있다. 1481, 사가독서 하던 젊은 선비들이 개성을 여행한 몇 해 뒤다. 길은 달랐다. 앞서 채수 일행은 낙하나루를 통해 임진강을 건넜다. 뒤 이은 유호인은 임진나루를 건넌다. 지금의 나그네는 적성 감악산을 나와 장단나루를 건너고 있다. 여정만 다른 것이 아니라 길 위에 펼쳐진 풍취도 달랐다. 채수는 유수의 별장에서 융숭한 환대를 받으며 여행을 시작한다. 유호인은 임진강 정자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강을 건넌다. 유쾌한 여행을 예감하게 하는 출발이다.

 

지금의 길손은 어떤가. 장단석벽 이십 리, 빼어난 경치를 바라본다. 단풍이 빛나고 풀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저물녘, 그 위에 기러기가 운다. 나루에 여행 짐을 내려놓는 모습엔 고단함이 묻어난다. 이 쓸쓸한 나그네는 생육신의 한 사람 남효온이다. 그는 채수, 유호인 등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여정만큼이나 인생행로는 크게 달랐다. 채수 등이 개성을 다녀오던 바로 그때 남효온은 소릉복위 상소를 올렸다가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한 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 능호를 박탈한다. 소릉복위 주장은 이런 조치의 잘못을 지적한 명분 있는 행동이었지만 한편으로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졌다. 상소 이후 남효온은 벼슬을 단념한 채 은거와 방랑의 삶을 살아간다. 비슷한 처지의 벗들과 죽림거사를 맺어 어울렸고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남효온의 1481년 여행은 소릉상소 이후 누구는 죽고, 누구는 유배가고, 남은 벗들도 뿔뿔이 흩어졌던 때에 이루어졌다. 울적한 심사를 풀어보려 떠난 여행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남효온은 여행을 기행24수로 묶어 기록했다. 임진강을 건너며 시작한 여행은 임진강을 건너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파산이 구월로 바뀔 때/ 낙하엔 물결이 일렁이네/ 누른 구름 양안을 덮었고/ 온갖 나무 파리한 모습이네/ 해질 무렵 험한 길 걸어가니/ 나그네 마음 급하고 급하네/ 황혼 되어 압도에 당도하니/ 강 가득 갈대꽃 밝게 피었네(남효온. 기행24마지막 수)”

마지막 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심정을 담았다. 압도는 행주에 있던 그의 집이다. 이 또한 앞서 채수의 귀환과는 다르다. “공무에 매인 몸으로 방외에 노닐 기회를 얻어 평소의 소원을 풀었으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는가.” 채수의 여행기는 이렇게 무엇인가를 얻어 가진 뿌듯함으로 마무리된다. 울적한 나그네 심정은 찾아볼 수 없다. 젊은 선비들이 잠시 잠깐 방외의 여행을 즐긴 것과 달리 남효온은 삶 자체가 방외에 놓여 있었다.

 

 

 

남효온은 4년 뒤에 또 한 번 개성을 찾는다. 죽림의 벗 우선언, 이총, 이정은과 함께였다. 나중 일이지만 이들은 연산군이 벌인 사화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남효온은 부관참시 되고 이총은 형제들과 함께 참수 당한다. 우선언 또한 유배에 처해지고 처자는 관노가 된다. 남효온은 세상에서 소외된 삶을 운명으로 여겼다. 스스로 도가서적을 잘못 읽어서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사람이라 여겼다. 그는 벌써부터 세상 밖 사람이었고 39세라는 짧은 생, 아니 긴 귀양살이 끝에 하늘로 돌아간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늘로 돌아간다는 현대시의 고전형이라 할 만 하다.

황정경 잘못 읽어 하늘의 견책을 받고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지 사십 년 세월이라(감흥중에서)”

생전에 남긴 그의 발자취는 하나하나가 방랑의 흔적인 셈이다. 방랑의 길목에서 그는 임진강을 건넌다. 그 고단한 자취는 스승이자 벗인 또 한사람의 길을 따라간 것이기도 하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 저자

#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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