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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와 인열왕후 한씨 합장능,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장릉

입력 : 2016-06-23 13:21:00
수정 : 0000-00-00 00:00:00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 합장능,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장릉

장릉기진제형참반기(長陵忌辰祭享參班記)

 

올 5월부터 11월까지 시범개방

나는 파주의 맛집 <강물나라>의 단골 고객이다. 어느 날 대화 중에 장릉 얘기가 나왔는데 그곳 사장님 말씀이 바깥양반이 장릉 관리소장인 관계로 자신은 그곳에 쉬이 드나들 수 있었다면서 일년에 한 번 기제사가 있는 날 하루에 한해서만 일반 관람이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굳게 닫힌 장릉 안을 더욱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일년 중 단 하루, 그 날짜에 맞추기란 지척에서 살면서도 조련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그간 장릉 폐쇄의 이유는 세월에 의한 손괴 때문이었단다. 지난 봄 드디어 대대적 개보수가 끝나서, 금년 한 해 동안 오월부터 십일월까지,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무료로 시범 개방을 한다고 한다.

 

▲엄숙하게 열리는 제향의식.

 

6월 17일 장릉제향을 보다

햇빛은 눈부시고 솔바람은 향기로운 병신년 유월 십칠일의 정오. 엷은 옥색 관복에 사모관대를 한 열네 명 제관들의 행렬이 홍살문을 지나 신위가 모셔진 정자각을 향해 느릿느릿 나아갔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제향 의식은 엄격한 형식에 맞추어 장중하게 진행되었다. 술잔에 제주를 따르는 집준자와(執尊者)와 그 첫번째 술잔을 받아 젯상에 올리는 초헌관(初獻官). 두번 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 마지막으로 올리는 종헌관(終獻官). 제사 말미에 이르러 “유세차아~” 하며 시작되던 축문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는 대축(大祝). 제사의 절차를 낭독하여 의식을 진행하는 찬자 (贊者). 찬자의 낭독에 따라 소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관들을 인도하는 알자(謁者) 등… 모두 한자어로 되어 있는 이들의 소임을 일일이 소개하는 일은 자칫 지루한 일이 될 것이다. 제사에 쓰이는 각종 집기의 이름과 음식의 이름까지, 그 많은 것을 나열할 수는 없다.

 

여기서 찬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리듬을 넣어 낭독하는 제향 절차의 시나리오인 홀기(忽記)의 한 구절만 보기로 하자. “알자~인~아헌관~예~신위전~북햐앙~리입! (謁者引亞獻官詣神位前北向立)” 순 한자로만 이루어진 한문 문장은 이런 뜻이라 한다. “알자는 아헌관께서 신위 앞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서도록 인도하시오!”

 

한 시간 걸린 제사

여염집에서라면 십분이면 끝날 제사가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또한 의식의 절차를 현대어로 번역해 주는 해설자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 내용을 도통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만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그들만의 의식. 이토록 어려운 한문 투의 글들을 현대어로 바꾸어 쓰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반서민적 형식이 가지는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과 품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떠올렸다. 이천 년의 세월을 경과하며 정착된 미사는 우리의 제사에 다름 아니며, 그 형식이 다듬고 또 다듬어져 하나의 예술적 성취를 이룩하게 되었다고.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각국이 미사를 자국어로 거행할 것을 결정하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봉헌되는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이루어졌었다. 우리의 왕실 제사가 한문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제사나 미사나 그것은 모두 일종의 퍼포먼스이며 종합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의 궁국적 형태는 내용에 앞서 형식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왕실 제사에서나 볼 수 있는 제사상.

 

인평대군파 종친회가 준비한 점심

예식이 모두 끝나고 제사 준비를 하는 집, 재실 앞마당에 쳐진 차일 아래 앉아 종친회가 준비한 점심 뷔페를 얻어 먹었다. 이들 종친회는 장릉의 주인인 인조대왕의 셋째 아드님, 인평대군파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쿠데타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왕권을 마음껏 행사하지도 못했고, 이괄의 난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면서 자심한 고초를 겪은 임금이셨다. 

병자년의 호란 때는 청 태종앞에 부복하여 삼배로써 항복의 예를 치렀는데, 그냥 엎드려 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마를 땅에 찧어 흐르는 피가 용안을 뒤덮게 했다 하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모였다. 내 옆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던 제관들은 아마도 제사를 올리면서 그 분의 고난에 찬 삶을 떠올렸으리라.

 

▲흔히 볼 수 없는 굽 달린 술잔.

 

제삿날만 먹을 수 있는 논산의 미주

뷔페는 깔끔한 것이 그런대로 먹을 만했고 곁들여 나온 청주는 제주로 쓰고 남은 술이었는데, ‘미주가효’라더니 정말 기가 막힌 맛이었다. 술 이름을 물었으나 알 수는 없었고 다만 충남 논산에 술도가가 있는데 오로지 종친회 제사 때만 납품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사실 나는 어쩌다 만난 전주 이씨들이 자신의 족보를 자랑삼아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시대착오적 자부심이 돈 키호테스럽다는 느낌을 갖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장릉 행사의 참반으로 그들에 대한 나의 판단이 편협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장릉도 개방되었겠다,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을 느끼러 갈 것이다.

 

 

 

글 · 사진 오상일 조각가

 

 

 

#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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