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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30) 임진란의 두 인물

입력 : 2021-10-15 04: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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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30) 임진란의 두 인물

박종일

 

 

[민족을 넘은 삶 - 김여철/와키타 나오카타, 한일 역사의 비밀의 문을 열다]의 표지

 

와키타 나오카타(脇田直賢, 1585 1660)는 조선출신의 사무라이이며 에도시대 초기에 카가(加賀)번 영주 마에다(前田) 가문을 섬겼다. 일본 역사에는 외국인 출신 사무라이가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그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한성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김여철(金如鐵)이다. 그의 아버지 김시성(金時省)은 조선의 고급 관리였고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1592). 한성이 함락된 후 (일곱 살)고아로 남겨진 김여철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부대의 포로가 되어 나고야를 거쳐 오카야마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히데이에의 아내 고()의 눈에 띠어 그녀의 보살핌을 받았다. 다음 해 고는 그를 친정오빠인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에게 보냈다. 토시나가의 아내 에히메(永姬)가 김여철이 마음에 들어 그를 가나자와(金澤)에서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규베이(九兵衛)란 이름을 받고 토시나가의 시종이 되었으며 녹봉은 230석이었다. 1605년 에히메의 주선으로 그는 마에다 가문의 가신인 와키타(脇田) 집안의 양자가 되었고 이때 와키타 나오카타로 이름을 바꾸었다.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타도한 오사카전투에서 나오카타는 뛰어난 공을 올려 녹봉이 15백석으로 올랐다. 그 뒤로 순조롭게 승진하여 그는 가나자와(金澤)의 마치부교((町奉行, 시장에 해당)에 임명되었다. 그는 렌가(連歌, 일본식 한시)의 일인자였고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고대소설)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 나오카타로부터 그의 4대손 규베이에 이르기까지 와키타 집안이 조성한 정원인 교쿠센엔(옥천원玉泉園)은 지금까지도 가나자와시의 명물이자 일본식 정원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오카타는 한 때 지하기독교인이었으나 만년에 가서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의 법명은 자신의 옛 이름인 여철(如鐵)이었다.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은 일본 이름이 사야가(沙也加)이며 임진왜란 때(1592)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으로서 3천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가 며칠 만에 조선에 투항하였다. 사야가는 귀순한 후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 등을 따라서 경주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고 이때의 전공으로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 받았다. 이듬해에는 도원수 권율(權慄) 등의 주청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제수 받았고 이름(김충선)과 본관(김해)를 하사받았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조총과 화포 등 일본의 무기 제조 기술을 널리 전수하여 전투에 활용하게 했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李德馨)정철(鄭澈)권율(權慄)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祐)이순신(李舜臣)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조총 등의 보급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1597년 정유재란 시기에 김충선은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宜寧)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24, 이괄(李适, 1587~1624)이 난을 일으키면서 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군출신들을 동원하였다. 이괄의 부장(副將)은 투항한 왜군 서아지(徐牙之)였는데, 54세의 김충선은 서아지를 김해에서 참수(斬首)하는 전공을 세웠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김충선은 민병 한응변(韓應卞) 등과 함께 자원군으로 나와 전투에 참가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와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병사를 무찔렀다. 김충선은 16429, 72세의 나이로 경상도 달성군 우록(友鹿)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록마을 입구를 지나면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으며 이곳에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서원과 사당은 김충선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청원하여 지었다. 그는 귀화의 이유로 예의의 나라를 흠모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만년에 쓴 자서전에 기록된 말이다.

임진왜란이라는 회오리 속에서 같은 시대에 각기 적의 나라에서 자기 삶을 개척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세운 두 인물의 극적인 삶을 바라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김충선이 살았던 마을) '달성 한일 우호관' 내부에 게시되어 있는 '모하당 김충선' 게시물로, 김충선의 초상과 그의 약력을 담고 있다.

한일우호관

 

#1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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