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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현 박사의 통일 문화 산책 ⑱ 갑산파 숙청 사건과 북한의 성장동력 (2)

입력 : 2015-09-25 1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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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파 숙청 사건과 북한의 성장동력 (2)

 

▲혜산시에는 집집마다 나무굴뚝이 서 있다.

 

김일성을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전투

50년대 종파사건을 거치면서 북한은 김일성 독재체제로 바뀌었는데 이를 심화시킨 결정적 사건이 바로 갑산파 숙청사건이다.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다 보면 혜산시 옆의 거대한 기념탑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보천보전투 기념탑이다. 김일성은 1934년부터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북만주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37년의 ‘보천보 전투"이다. 이는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가 양강도 갑산군 보천보의 일제 관공서를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을 뿌리고 주민들에게 연설한 뒤 퇴각한 사건이다. 이 전투는 군사적으로 큰 성과를 거둔 싸움은 아니었지만,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독립운동이 퇴조하던 시기에 우리 민족에게 사기를 높이고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만들어 김일성을 비롯한 공비들이 보천보에서 살인, 방화, 약탈 등을 저질렀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이를 계기로 26살 청년 김일성이 조선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일성 옹립 앞장섰던 갑산파

일제는 대대적인 수사를 통해 보천보 전투시 국내에서 김일성 부대를 도와 통신을 두절시키고 퇴각로를 만들어줬던 국내 활동가 100여 명을 체포했는데 이 사건이 바로 ‘혜산사건"이다. 혜산사건으로 체포돼 투옥된 사람들은 박달처럼 고문을 당해 앉은뱅이가 되기도 하고 오랜 기간 징역을 사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들을 훗날 갑산파라고 부르는데, 해방으로 출옥한 후 북한의 건국사업에 참여해 주로 당에서 활동했으며 김일성을 지도자로 옹립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하였다.

 

북한에서는 전후 복구가 성공해 사회적으로 희망과 낙관이 들떴던 60년대 중반,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 · 농업의 동시 발전"이라는 방침을 채택해 군비증강에 치중하면서 당료파와 군사파 간 노선투쟁이 벌어졌다. 당료파로 불리는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들은 군비증강보다는 인민생활의 질 향상에 예산을 배분해야 한다면서 김창봉, 오진우, 허봉학 등 군사파와 대결했지만 김일성이 군사파 손을 들어주면서 패배하고 만다. 그 결과 ′67년 5월 노동당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갑산파에 대한 숙청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김일성은 갑산파를 이끌었던 박금철의 죄목을 일제시기 지하투쟁의 변절자, 자기 투쟁업적 과시, 김일성 유일사상 반대 및 당부위원장으로서 당의 군사노선 집행에 소극적인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노동당의 주요 보직을 장악했던 박금철 등 갑산파들이 당시 진행되던 김일성 우상화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숙청사건으로 성골인 북만주 빨치산파에 이어 진골로서 북한 지도부를 형성했던 갑산파와 이들과 연계된 당·정 간부들이 사라짐으로써 북한은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김일성 유일체제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이후 김일성의 정책과 지침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책토론이 사라지게 해 북한을 무기력한 사회로 전락시켜 훗날 경제난 ·식량난의 비극을 야기시켰다.

 

압록강을 사이에 둔 혜산과 장백현

혜산시는 중국과 거리가 매우 짧아 90년대 후반 아사자들이 속출했을 때 탈북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혜산 바로 앞 압록강 폭은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30m도 안되는 곳이 많고 겨울이면 강물이 두껍게 얼어붙어 쉽게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강 건너 중국땅 장백현으로 넘어간 이후 지형상 내륙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워 다시 잡혀 북송되거나 산에서 동사하는 등 처참한 비극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장백현에서 혜산을 바라보면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뙈기밭이 촘촘히 들어서 있어 이 곳 주민들의 팍팍한 삶을 짐작케 한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혜산시와 장백현은 북한과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60~70년대 혜산사람들의 도움으로 아사를 면했던 중국 장백현은 지금 아파트 건축 등 개발열기로 온도시가 들떠있는 반면, 북한 혜산시는 수 십년 전 지어진 음울한 회색빛 건물 그대로이다. 김일성을 북한의 수령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지역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정치학박사 ?/span>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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