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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⑱ 도굴의 내력

입력 : 2015-06-26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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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의 내력

 

중국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황제로 등극한지 3년 만인 황초(黃初) 3년(서기 222년)부터 수양산(首陽山) 동쪽 자락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덤을 소박하게 만들고 금은보화를 부장하지 말 것이며 질그릇만 사용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조비는 자손들이 "조상을 섬기는 마음에서 오히려 조상의 뜻을 어길까" 염려하여 자신의 명령을 어기면 땅속에 묻힌 뒤에도 찾아와 죽이겠다"는 조서를 종묘에 보관하고 사본 두 부를 만들어 대신들로 하여금 보관하게 하였다.

 

조비가 황제로서는 단출한 무덤을 고집했던 이유는 도굴을 염려했기 때문인데, 조서에서는 도굴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비난의 말을 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조조(曹操)가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긴 도굴범이었기 때문이다. 원소(袁紹)가 조조를 토벌하는 격문에서 여러 가지 죄상을 열거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도굴행위였다.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는 한(漢)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이고 한 경제(景帝)의 동생이었다. 그의 무덤은 망탕산(芒?山)에 조성되었고 규모가 거대했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망탕산에 들어가 양효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금은보화 수만 근을 꺼내갔다. 조조처럼 군대를 동원해 도굴한 사람은 그 후에도 있었다. 오대(五代) 시대의 군벌 온도(溫韜)는 당(唐) 나라 황실의 여러 무덤을 도굴했다. 중화민국시대의 군벌 손전영(孫殿英)은 자희태후(慈禧太后, 우리에게는 서태후로 잘 알려져 있다)의 무덤을 열고 부장된 금은보화를 꺼내가 군자금으로 썼다. 그러나 그들이 군대를 동원한 것은 임시적인 방편이었을 뿐 조조처럼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 모금교위(摸金校尉) 같은 관직까지 설치하고 도굴 전문 부대를 운용하지는 않았다. 

 

조비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자고로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고,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 없었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 예언이기는 하지만 그의 말은 역사적인 감각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이런 도리를 모르고 스스로 "시황제"라 부르며 만대에 걸쳐 황위를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국은 2세로 끝나버렸다.

 

 

 

 

박종일 (지혜의 숲 권독사)

  

 

 #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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