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29) 9. 율곡과 우계, 평생의 벗 (3) 그들이 떠난 뒤

입력 : 2021-07-29 07:15:59
수정 : 2021-07-29 07:20:13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29)

 

9. 율곡과 우계, 평생의 벗

(3) 그들이 떠난 뒤

 

▲ 화석정(좌)과 임진나루 진서문 / 이은상의 적벽유예 실친 청전 이상범의 삽화(1934년, 동아일보)

 

율곡은 솟구쳤고 우계는 내려앉았다. 율곡은 솟구쳐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비가 내리자 단번에 큰 강이 됐다. 우계는 시내 같았다. 이 개울 저 개울, 물을 모아 깊은 못을 만들었다. 고였던 물은 어느덧 넘쳐 강을 이뤘다. 골짜기 물과 시냇물은 운명처럼 만나 도도한 강이 되었다. 그리고 3백여 년이 흐른 20세기 초 한 사람의 여행객이 그 강을 따라 화석정에 오른다.

화석정의 가치는 남이 저를 보아주는 데 있지 않고 제게서 남을 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강상에 떠서나 또는 임로 중에서나 밖에서 화석정을 보는 것보다 화석정에 서서 강류와 산야를 조망하는 거기에 화석정의 가치가 있다 하겠더이다.(이은상. 적벽유중에서)”

 

화석정이 갖는 의미를 포착한 시각이 돋보인다. 화석정의 의미를 저에게서 찾지 않고 거기서 바라보이는 세상에 두는 기술은 율곡의 삶을 보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작자의 탁견 뒤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대목이 이어진다. 율곡이 여덟 살에 지었다는 화석정 시와 관련한 내용이다.

 

화석정에 걸린 시판을 보니 그 시는 창녕후인 매연거사(성명미고)의 작임을 알겠더이다.”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창녕후인 매연거사는 누구일까? 후인, 거사로만 표현된 이 사람은 창녕성씨, 매변 성직이다. 그는 우계의 손자다. 이 시판은 율곡이 시를 지었다는 8세와 성직이 글을 새긴 때 나이인 92세를 합쳐 일명 백세현판이라고 전해온다.

성직은 1586년생으로 당시로는 드물게 95세까지 살았다. 90세가 되던 해에 특별한 벼슬을 받았는데 대궐로 들어가는 걸음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줄곧 파산을 지키며 살았다.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진 화석정이 다시 세워진 것이 1673년이다. 성직이 92세 되는 해는 1677. 앞뒤 몇 년을 따질 필요 없이 백세란 표현은 그럴듯해 보인다. 백세현판은 일부러 맞춘 것인지는 모르지만 기막힌 기획이었음은 분명하다. 중건을 이끈 사람은 이후지, 이후방 형제인데 이들은 율곡의 조카 이경진의 손자다. 이경진은 우계의 제자이기도 하다. 마침 우계 임종 직전에 불탔던 우계서실도 이때에 와 복구된다. 율곡과 우계는 사후에도 이렇게 대를 이어 만나고 있었다. 이것이 집안의 인연에 그치지 않음은 물론이다. 제자들과 그 당파, 그리고 임진강을 건너는 뭇 길손들에게 율곡과 우계는 이전에는 없는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가히 임진강은 율곡과 우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만큼 그들의 족적은 뚜렷하다.

 

 

 ▲ 우계와 율곡 사이를 흐르는 임진강

 

자운동과 향양리에는/ 사시던 집터 아직도 남아 있네/ 사당이 우뚝이 서로 인접해 있으니/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라오/ 먼 나그네 수레 몰고 와서/ 고적을 방문하고 긴 탄식 일으키네.(이의현. 파주에 이르러일부)”

 

율곡에서 우계에 이르는 길은 지금도 이어져있다. 화석정과 파산서원도 변함이 없다. 다만 이곳을 찾아 느끼는 감흥이 예전 그것일 수는 없다. 그때의 높이를 재현하려는 시도는 실패가 뻔하다. 오늘에 와 이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율곡은 선비의 현실참여를 대표한다. 사단은 칠정 가운데 있다. 인심은 도심이 되기도 하고, 도심이 인심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노력만 있다면 현실참여를 경계할 이유가 없다. 우계는 비판적 재야성을 보여준다. 사단은 사단이고 칠정은 칠정이다. 선비는 오로지 도심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현실 영합적 자세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율곡은 우계가 있음으로 해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원칙을 견지할 수 있었다. 우계는 율곡으로 해서 자기만족의 은둔자가 아닌 도학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율곡의 참여점과 우계의 재야성은 서로를 자극하며 둘을 더 큰 길로 이끌었다. 우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만약 율곡에게 정치만 남기고, 우계에게 명분만 쥐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안타깝게도 이들 사후 당파의 분립은 한쪽을 버리고 한쪽만 취하는 편향을 낳았다. 오늘 율곡과 우계를 잇는 의미의 한 자락이 여기 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129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