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식] 셰이프리스 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축 십 년 후의 기록
셰이프리스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축 십년 후의 기록
민현준
135×225mm / 양장 / 280면 / 올컬러 도판 157점 / 값 29,000원
최근 건축계에서는 유명해외 건축가 중심의 국제지명건축공모 방식이나, ‘브랜드화’된 건축가의 개성적 형상에 기대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민간상업 건축뿐 아니라 사회기반 시설이어야 할 공공 건축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23년 11월 개관 십주년을 맞았던 서울 소격동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서울(이하 서울관)은 건축가가 공모전 제안에서부터 ‘셰이프리스(shapeless)’, 즉 무형(無形)의 개념을강조하여 이러한 보여주기식디자인 경향과는 대척점에있는 사례이다. 건축 자체의형상을 부각하는 것이아니라 주변 맥락과융화되는 공간 시스템에중점을 두는 개념으로, 첫인상이 압도적이진 않아도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카페나 도서관처럼 일상에스며드는 미술관을 의도한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셰이프리스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축 십년 후의 기록』은서울관을 설계한 건축가민현준이 지난 십년을 되돌아보며 건축기록을 엮은 것으로, 개인의 건축 아카이빙작업일 뿐 아니라앞으로의 한국 공공건축을 위한 제안이기도하다. 여기에는 공모전 제안당시부터 설계와 공사과정, 개관 이후 운영방식까지 건축가의 시선으로담겨 있다.
불통의 공간에서 국가를 대표하는미술관으로
서울관 부지는 조선시대에종친 관련 사무를관장하던 주요 관서인종친부(宗親府)가 있었고,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이 설치된일제강점기부터 제삼공화국의 끝과제오공화국의 시작까지 대한민국의근현대사를 거쳐 온중요한 장소이다. 특히 1971년부터 삼십여년간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가 자리했던 시절에는시민들의 접근이 허용되지않고 북촌의 수많은보행 가로들이 가로막힌권력의 땅이었다. 이처럼 여러층위의 역사들이 공존하는자리에 현대 미술관이들어선 사례는 세계적으로도흔치 않다.
서울관 프로젝트는 2009년 겨울부터이듬해 여름까지 두번의 공모전을 치르면서시작되었다. 공모에서 요구된 것은 1986년 과천으로 이전(移轉) 개관하여 근대적인 벽면전시 위주인 국립현대미술관과천의 역할을 확장하고그 한계를 개선하는미술관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발전 수준이나 서울이라는도시가 가진 위상에비해 공공 미술관의상황은 열악했기에, 저자는 이십일세기서울의 중심지를 어떻게해석하는가가 계획의 중요한시작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인언어의 건축보다 서울이가진 도시적 역사적성격과 결합해 장소특정적인아이덴티티를 만들어냈다.
크게 6장으로 구성된 책은기본적으로 건축설계 과정과비슷하지만, 모든 내용이 병렬적관계를 이루도록 되어있어 독자들이 각자흥미로운 주제를 선택해살펴봐도 무방하다. 책에는 건축물사진과 공모전에 제출한배치도, 해외 사례 등시각자료 157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설계 당시의스케치, 샘플 모형 등건축가의 아이디어 전개를엿볼 수 있는자료도 포함된다.
각 장의 제목은새로운 미술관을 정의하는용어이며, 부제목은 기존 미술관의관습에서 벗어난 서울관의지향점을 의미한다. 1장 「동시대미술관: 박물관에서 미술관으로」에서는 서울관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앞서 저자가 오래전부터가져 온 현대미술관에 대한 의문들과경복궁과 북촌을 중심으로한 서울관 주변의도시적 맥락에 대해다룬다. 이에 더해 미술관건축의 시작으로 알려진뒤랑(J. N. L. Durand)의뮤지엄 유형에서부터, 미술관의 전형이라불리는 사례들, 이십세기 후반들어 전형에서 벗어난런던 테이트모던이나 뉴욕구겐하임미술관 등의 선례를폭넓게 따라가면서 서울관이라는결과물이 어떤 변화의흐름 속에서 탄생했는지그 본질을 이해할수 있도록 했다.
형상 너머의 건축
2장「셰이프리스 미술관: 형상에서 전략으로」에서는공모전의 진행과 설계, 개관까지의 전체적인 과정을짚어 보면서 ‘셰이프리스미술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구현되었는지를 살핀다. 1차 공모전에서는‘옛 기무사 부지’의활용이 핵심이었으나 공사도중 출토된 종친부유구(遺構)로 인해 2차 공모전에서는서울관의 상징적 중심이‘종친부 터’로 옮겨졌다. 여기서 마당은 저자가이 변화에 대처하고설계안을 발전시킨 중요한요소로 언급된다. 고도지구로 지정된경복궁 주변의 12미터 높이제한에 따라 서울관의전시실을 대부분 지하에배치해야 했으나, 종친부 관련원칙상 가능한 한지하를 개발하지 않아야하는 등 복잡한실타래를 풀어나간 여정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조선시대와 근현대건축물, 그리고 미술관의 공존을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한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거쳐야만했던 문화재 심의와주변 이웃과의 합의과정 등을 구체적으로서술함으로써 다른 공공건축 계획에서 선례로참조할 수 있도록했다.
이어지는 3장 「장소특정적 미술관: 탈맥락에서 재맥락으로」에서는 현재는 미술관의 주출입구가 된옛 기무사 본관과종친부, 이를 해석한 서울관건축과의 관계를 논한다. 공용 홀이자 전시공간으로도활용되는 ‘서울박스’와 과거병원이었던 자리에서 중정으로변화한 ‘전시박스(현재의 전시마당)’, 미술관마당, 종친부마당 등 서울관을장소특정적으로 구성하는 중심공간들을 살펴본다. 서울관 전면에별도의 건물로 배치된‘교육동’은 전시를 관람하지않는 시민들도 편히이용할 수 있도록동선과 조망을 고려한개방적인 공간이다. 강의실과 작가의작업실, 도서관 등으로 구성된이곳은 교육공간의 비중이증가하고 있는 해외의주요 미술관처럼 미래교육에 대한 높은비전을 상징한다.
다만 모든 공간이 설계 의도대로 실현된것은 아니며, 실현되었더라도 운영중 폐쇄적인 구조로바뀌기도 하여 건축가로서아쉬운 심경 또한조심스레 풀어놓는다. 한편 서울관에사용된 주요 건축재료를 보면 경복궁옆 종친부 터에‘전통적이지 않은’ 건축물을만들어야 했던 고민의흔적이 엿보인다. 그중 백색에가까운 고령토를 사용한테라코타 타일은 어두웠던터의 역사를 반전시키듯따뜻하고 밝은 분위기를지니며, 주변의 유적과 함께세월을 품어 가기를기대한 건축가의 소망이담겨 있다.
동시대 미술을 위한 건축의변화
4장「열린 미술관: 보물창고에서 공원으로」는미술 애호가뿐 아니라일반 대중까지 끌어들이는공간적 장치이자 동시대미술을 위한 변화된형식으로서의 ‘열린 미술관’을소개한다. 상업화되고 세분화된 도시공간을잇는 ‘공원’을 닮은서울관에는 담장이 최소화되었으며, 사람들은 어느 방향에서든자유롭게 대지로 들어오거나이를 통해 지나갈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활보하는 보행자의 존재와좋은 도시는 긴밀한관계를 맺으므로 가로막혔던골목들을 연결시키는 것은서울관의 해결 방안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지구단위계획규정에 따른 공중보행로의설치 의무는 가장긍정적이었다.
5장부터는서울관에 영향을 준특정 사례에 심층적으로접근하면서, 서울관을 중심으로 동시대미술관 건축의 변화를고찰한다. 연대기순으로 작품들을 벽에걸어 배열했던 전통적인미술관과 달리 이제는작품 자체가 아니라작가와 관람객이 직접적으로관계를 맺으며, 관람객이 참여하는작품은 전시환경과 나아가미술관을 변화하게 만든다. 5장 「관람객 중심형미술관: 이동에서 집중으로」는 이에따른 전시실 단위공간에대한 내용으로, 서울관의 주축이되는 각각의 전시실들을몇 가지 형식으로구분한다. 회화를 위한 전통적인화이트큐브형 전시실부터 설치미술을위한 매직박스형 전시실, 영상과 음향이 포함된다원 예술 전시에적합한 블랙박스형 전시실이그것이다. 서울관 설계에서 많은영향을 받은 인물중 하나는 작품과관람객 간의 관계에기초한 미술관 건축을제안했던 레미 차우그(Rémy Zaugg)로, 그의 기본적인 개념을설명하면서 서울관 외에그를 참고한 사례들도소개한다. 6장 「군도형 미술관: 선형에서 그물망으로」는 전시실이아닌 공용공간들이 주인공이다. 공모전에서 서울관을 정의했던개념 중 하나인‘군도(群島)’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군도란 무리를 이루면서도독립적으로 흩어져 있는섬들이다. 즉 전시실들을 무리지은 섬으로 본다면그밖의 공간들은 이들을연결하는 바다라 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느슨한 배열에따라 관람객이 참여할여지가 생겨나며, 미술관 건축의새로운 전형이 만들어진다. 수동적인 선형의 동선과대비되는 네트워크형 동선이적용되는 미술관에서는 전시의독립성과 관람객의 자유가보장된다. 하나의 전시실은 하나의건물이 되고, 이를 연결하는동선공간들은 골목길이 되어미술관 내부에 작은도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공간적 기술적 문제들이해결된 다음에는 사람들의움직임이나 자연광, 소리에 관한세부적인 요소들이 디자인되었다. 서울관은 대부분의 전시실이지하에 위치하기 때문에지상의 자연광을 어떻게지하로 끌어들이느냐가 중요한설계 주제였다. 이를 위해건축가는 일반 유리보다녹색이 적어 맑고투명한 느낌을 주는저철분 유리를 택했다. 또한 ‘도시를 보는창’이나 전시실 내로채광을 유입시키는 천장시스템을 적용함으로써 조도를보완하면서 다양한 빛환경을 연출했다.
또 다른 십 년을향하여
아트숍, 카페, 식당 같은 편의시설은동시대 미술관의 정체성을나타내는 중요한 시설이다. 서울관에서는 특히 휴게공간(현재의 카페)이 위치적으로나내부 기능적으로 가장의미있는 자리에 있다. 이에 따라 열린형태로, 내부적으로는 공간들의 연결역할을 하도록 계획되었으나점차 상업시설의 운영방향에 따라 폐쇄적으로변해 가고 있음은안타까운 일이다. 그밖에도 사소하게여겨질 수 있는요소들이나 운영에서 활성화되고있지 못한 공간들은독자들과 관람객들의 새로운시선과 관심을 요하고있다.
도시와 건축공간의 기본은움직이는 공간과 머무르는공간의 조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마당은 길의 확장으로, 골목길들이 모여 넓어지면마당이 되고 더커지면 광장이 된다. 이처럼 서울관은 다양한위치와 형태의 공간들이관람객들이 모이고 머무르는동시에 흩어지는 결절점역할을 하도록 계획되었다. 이러한 공간들이 세계어느 미술관에서보다 대중참여적으로 작동해 왔다. 느슨한 건축과 그안의 역동적인 공간시스템이 변화무쌍한 현대미술을위한 인프라를 만들어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십여 년이 지난후에야 이 책을낸 이유에 대해저자는, 개관 당시에는 사회적이고정치적인 요인들이 많았으나이제야 비로소 건축자체로만 볼 수있는 시점이 되었기때문이라고 밝힌다. 작가들과의 긴밀한소통 속에서 준비된개관전은 물론이고 그이후 지금까지 좋은전시들이 개최되었고, 그동안 많은시민들이 이용하며 공간에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관람객들에게 서울관과 이에관계된 이야기들이 전시만큼이나감상과 영감의 대상이되기를 바라며, 건축물에 대한이해가 바탕이 된다면방문했을 때의 감흥도배가될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건축인들에게는 동시대 미술관에관한 최신의 각론(各論)으로, 공공 건축 사업관계자 및 서울관의관리자 등에게는 서울관과같은 특수한 공공건축물을 이해하는 안내서로, 구체적인 지침이 되어줄 책이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 폐쇄와불통을 상징했던 터가기나긴 논의와 합의의여정을 거쳐 지금의모습으로 변모한 것처럼, 앞으로도 새로운 예술과다양한 사람들이 서울관을채워 나가길 기대한다.
이 책에서 공간명칭은 준공 시점을기준으로 적되, 필요에 따라계획안이나 현재의 명칭, 실현되지 못하거나 변경된내용도 밝혔다. 책 끝부록에는 프로젝트 개요와상세 도면을 수록하여전체적인 구조는 물론여러 방향에서의 단면도확인할 수 있도록했다.
차례
책머리에—욕망을비운 건축
1. 동시대미술관: 박물관에서 미술관으로
현대 미술관의 의문들 / 미술관의 전형 / 도시와 미술관 / 서울과 소격동 대지
2. 셰이프리스미술관: 형상에서 전략으로
두 번의 공모전 / 무형의 미술관 / 건축 답사와토론 / 문화재 심의 과정 / 합의의 미술관 / 설계와 시공 / 건축가와 공사 현장 / 개관과 홍보
3. 장소특정적미술관: 탈맥락에서 재맥락으로
적층된 역사들 / 옛 기무사본관, 미술관의 입구 / 국군서울지구병원 터, 교육동 / 서울관의 상징적 중심, 종친부 / 미술관의 중심공간, 서울박스 / 지하 전시실의빛, 전시박스 / 미래의 유산, 계단박스 / 중재와 소통, 마당들 / 역사적 증인, 비술나무 / 질료와 형상
4. 열린미술관: 보물창고에서 공원으로
담장과 공중보행로 / 일상 속의미술관 / 턱이 없는 미술관 / 외부 공간의 재조명 / 공원 같은 건축
5. 관람객중심형 미술관: 이동에서 집중으로
미술관과 동선 / 전시실이 된작업실 / 관람객의 부상 / 몰입의 장소 / 전시실의 조합 / 화이트큐브의 재맥락화 / 참여적 전시와 매직박스 / 전시와 공연의 결합, 블랙박스 / 기무사 사령관실의 재현, 8전시실 / 선형 미술관의 유산, 로비홀 / 전시의 연장, 수장고
6. 군도형미술관: 선형에서 그물망으로
느슨한 집합체 / 공용공간의 가능성 / 역공간의 진화 / 제이의 전시실 / 네트워크형 동선 / 하역과 전시의통합 / 편의시설의 실험 / 비물질의 디자인 / 마당과 동선의 결절점
주(註)
프로젝트 개요 및세부 도면
저자 소개
민현준(閔鉉畯)은 1968년 출생으로, 건축사사무소 엠피아트(MPART) 대표건축가이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캠퍼스(UC Berkeley) 환경대학원을졸업하고, 건축사사무소 기오헌과 미국에스오엠(SOM)에서 실무를 익혔다. 귀국 후 행정중심복합도시중앙녹지 국제공모(2007)에 입상하면서자신감을 얻어 건축사사무소를설립했다. 강변·교량·가로디자인 등 도시환경디자인에서 시작해 건축및 거대 도시계획까지 넘나들면서 도시와건조 환경의 사회적문제와 공간적 개선을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공사가진행되는 동안 「현대미술관의군도형 배열에 관한연구」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작업으로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헤럴드신문사 사옥, 현대자동차그룹 영남권 연수원, 서울시 산악문화체험센터(박영석기념관), 천안 성거산성지성당, 파주 DMZ유니마루미술관, 콩치노콩크리트, 명선아트홀 등이 있으며충남국제전시컨벤션센터, 인천뮤지엄파크, 부산북구청사가 진행 중이다.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에서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대학 교수로재직하며 다음 세대건축가 양성에 힘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