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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로 가는 한 걸음(2) 동서독 통일의 현장을 가다 2 - 베를린 화해의 교회

입력 : 2020-02-22 10:21:41
수정 : 2020-07-03 01:45:30

통일로 가는 한 걸음(2)
동서독 통일의 현장을 가다
<2>

   베를린 화해의 교회, 그리고 참회와 속죄의 성당

 

1990103,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져 있던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언한 날이다. 2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의 4개국에 의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분할 점령되었으며 동독지역은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베를린은 동독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 또한 반으로 나누어지고 19618월에는 동베를린 주민의 서베를린 탈출을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다.

19455월 동서독 분단 이후 199010월 통일이 될 때까지 45년 동안 2개의 국가로 존재했던 독일. 독일인들은 그 45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베를린 장벽과 분단의 흔적들을 둘러보면서 가진 의문이었다.

베르나우어 거리에 있는 베를린 장벽공원은 과거 동독 국경 수비대가 국경을 탈출하는 이들을 무차별 사살했던 비극의 현장이다. 지금은 철거된 장벽 800m가량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희생된 이들의 사진과 그들을 추모하는 시설이나 조형물 등이 설치되어 있다.

 

 붉은 색이 베를린장벽으로 오른쪽은 동독, 왼쪽은 서독 지역이었다.

 

평일 오전이었으나 일반 관광객은 물론이고 국경수비대가 있던 시설을 견학하러 온 학생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장벽 한쪽에는 당시 베를린 장벽을 건설할 당시의 모습을 시대별로 촬영한 대형 사진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장벽 건설 초기의 모습은 재미있기까지 하다.

우리에게 38선은 철조망과 지뢰밭, 무장한 군인들로 기억되고 있지만 베를린 장벽의 초기 모습은 소박하기까지 하다. 마치 이웃집 무너진 담장을 수리하듯 작은 담장 위에서 벽을 쌓는 동독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서독의 아이들 모습이 그러하며, 소박한(?) 담장이 만들어진 이후 그 담장 틈으로 건너편을 들여다보는 서독사람의 모습은 코믹한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동독 시민들의 처절한 모습을 담은 사진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면 철조망을 뛰어넘고 담장을 뛰어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동독 시민들의 처절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이어진다.

장벽공원 한쪽에는 장벽을 넘다 희생당한 동독 주민들 138명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꽃들이 놓인 모습을 보자니 광화문 광장에 전시되어 있었던 세월호 희생자들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독일은 2차 대전 전범국가로서의 책임 때문에 분단이 되었는데, 우리는 식민지였다가 해방이 되면서 분단이 되었다. 전범국가는 일본인데 일본은 그대로 두고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면서 분단이 된 것이다. 외세의 이해관계 속에 분단된 우리는 그 이후 서로를 증오하며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게 된다. 그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남아 남과 북, 그리고 남과 남을 가르는 원죄가 되었다.

독일은 비록 분단이 되었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노력의 기원은 196910월에 들어선 빌리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으로 시작된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은 취임연설에서 "동독의 존재를 독일 내의 제2의 국가로 인정하여 동등자격의 기초 위에서 동독정부와 만날 용의가 있다"라는 동방정책을 발표한다. 그리고 서독정부는 동서독 교역을 국내거래로 간주하여 거래되는 상품에 대하여는 비관세 원칙, 부가가치세 경감 및 면제 조치, 금융지원 등 거래지원 시책을 강구하여 동독과 서독의 밀접한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동서독은 서로의 방송을 볼 수 있었고 서신교환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 했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독일 통일 과정을 보면, 동독 주민들은 흡수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통일의 주역으로 행동했다. 동독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매주 월요일 독일 통일을 위한 기도회와 집회를 열었고 이 기도회가 점점 커지면서 당시 동독 정권의 유혈 진압, 발포 협박에도 1989109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촛불시위를 벌이면서 통일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장벽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나무기둥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원형 구조물이 보인다. 바로 화해의 교회이다.

 

 

 화해의 교회

 

 

화해의 교회는 분단과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동독에서 탈출하다 희생당한 138명의 사람들을 기리는 곳이자 분단의 희생자를 기리는 곳으로 독일 통일 이후 건립하였다. 원래 이 자리에는 1885년에 세워진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가 세워진 지역은 베를린 안으로 꾸준히 흘러들어오는 가난한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독일의 마지막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가 이들을 위해 세웠다고 한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서로 화해하라는 의미에서 이름 지어졌다는 화해의 교회는, 네오고딕 양식의 전형적인 뾰족탑 교회의 모습이었다. 교회의 위치가 동독과 서독의 경계선에 있어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많은 주민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으나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후에 왕래가 어려웠다. 그러나 서베를린 사람들이 몰래 찾아오거나 동베를린 사람들이 탈출하는 곳으로 이용될 위험이 있다고 하여 1985, 동독 정부는 이 교회를 아예 파괴해 버린다. 장벽에는 당시 교회를 파괴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교회 안에는 베를린 장벽을 넘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촛불이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다.

교회 앞에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뭉클한 느낌이 들게 하는 이 조형물은 마침내 동독과 서독의 주민이 만나서 통일의 감격을 나누는 장면이다. 이들 밑에는 철조망이 상징처럼 둥그렇게 쳐있었고 그 철조망 안에 성경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그 철조망 위에 장미를 얹어 놓았다.

철조망과 성경.’

통일은 정치나 무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화해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징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휴전선 철조망이 걷히고 남과 북의 주민이 함께 끌어안을 수 있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감격의 포옹, 그리고 철조망과 성경.

 

 

화해의 교회를 보면서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생각한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북녘 땅이 보이는 곳에 세워진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베를린 장벽에 세워진 화해의 교회와 그 건립 목적이 같았고, 1982년부터 독일 통일을 위해 성 니꼴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월요기도회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매주 토요일에 거행하는 토요기도회와 그 지향하는 바가 같았다.

독일 통일을 위해 직접적인 행동과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동독 주민들, 그리고 그 동독 주민들의 행동을 만들어낸 불씨가 되었던 성 니꼴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처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진행하는 토요기도회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물꼬를 트는 불씨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기원했다.

 

 

 

▲ 참회와 속죄의 성당 내부 모습. 중앙의 모자이크는 남측이 전달한 밑그림을 평양 만수대 창작사 공훈작가들이 단둥에서 만들어 옮겨온 것이다.

 

 

 

 

 베를린 장벽

 

 장벽을 넘다 희생당한 사람들

 

 #112호

 

이철민

-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 전 지부장

- 4.27평화띠잇기 파주본부 대외협력팀장

- 참회와 속죄의 성당 민족화해분과장

- 도서출판 바이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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