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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9)  3.유배와 망국, 목은 이색의 장단음(長湍吟)  ③ 고려, 쇄신과 망국의 갈림길

입력 : 2019-12-06 09:07:19
수정 : 0000-00-00 00:00:00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9) 

3.유배와 망국, 목은 이색의 장단음(長湍吟)

  고려, 쇄신과 망국의 갈림길

 

▲ 이색이 오른 장단의 고루는 호로고루일 것이다.

 

망국의 그림자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려는 외침과 내환 속에 병들어 갔고 이를 극복할 뾰족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안팎으로 둘러싸인 기득권의 굴레는 몇몇 영웅의 결심으로 극복될 것이 아니었다. 공민왕의 쇄신은 수백 년 왕조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내부도 감당하기 힘든 판에 외부의 적까지 상대해야 했다. 1361년 홍건적 10만 명이 몰려들었다. 거란, 몽골과의 전쟁이후 고려는 다시 한 번 도성을 버리고 피란정부를 꾸려야 했다. 11, 공민왕은 도성을 버리고 안동으로 피란한다.

왕이 임진강기슭에 어가를 멈추고 산천을 살펴보면서 원송수와 이색에게 말하기를, “풍경이 이처럼 아름다우니 경들은 마땅히 시구를 하나씩 지어 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고려사]”

급박하고 처참한 지경에도 왕은 위엄을 버리지 않았다. 조선선비 이덕무는 공민왕의 태도를 가식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왕이야 비록 풍류스럽다고 하겠지만, 목은의 눈썹은 아마 한번쯤 찌푸려졌을 것이다.”

이덕무는 이색을 끌어들여 말했지만 실은 그 자신의 눈이 찌푸려졌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자기기만일망정 당시 상황에서 풍류를 운운하는 것은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이 숭인문을 나서니,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어미는 자식을 버리고, 짓밟히고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하였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려사절요]”

 

고려사는 더한 장면도 서술한다. 홍건적이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차마 믿기 어려운 참상이다. 왕이 명령했지만 이색과 원송수는 시를 짓지 않았다. 풍류는 왕의 호기일 뿐 쫓기는 이들에겐 그럴 기분도 그럴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시는 2년간의 피란을 마치고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인다.

작년에 어가가 서울 떠날 때에/ 구름 갈리 듯 비 흩어지듯 눈물만 흘렸더니/ 오늘까지 살아있을 줄 뉘 알았으리/ 당시를 생각하니 전생일 같구나/ () / 내 짓는 시 흥이 나서 짓는 것 아니고/ 임진강 건너오던 일 적어 두려 함이로세.(원송수. 임인청주작)”

안동에서 환도하던 중 청주에서 쓴 시다. 원송수는 시를 짓는 이유를 흥이 나서가 아니라 눈물만 흘리던 그날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라고 말한다. 시에는 환란이 끝난 뒤의 기대가 함께 담겨있다. 2년 전 임진강을 건널 때는 모두가 다급했다. 왕은 태연한 척 했지만 속마음도 그랬을 리 없다. 전쟁이 수습되고 환도하는 길에서야 이들은 여유를 찾는다. 비로소 풍경을 살피고 다급했던 그날을 회상한다. 그리고 호기일망정 공민왕은 힘이 남아있었다.

이색이 임진강을 노래한 것은 그보다도 훨씬 뒤다. 공민왕에 이어 우왕이 즉위하고 새 임금과 남경에 머물다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 고루에서 본 임진강

 

군왕이 말 달리며 봄 사냥 즐기는 곳/ 눈 녹은 파평 땅에 풀빛이 부옇도다/ 강물 낀 양안에 석벽이 묘하기도 한데/ 물 굽어보는 고루를 누가 또 세웠는고.(이색. 장단 납발에서)”

 

이덕무의 생각처럼 이색의 눈이 한 번쯤 찌푸려졌는지는 모르지만 길은 남아 있었다. 고려는 공민왕과 신돈, 우왕과 창왕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정치의 격랑을 헤쳐 가는 중이었다. 이색은 고루에서 강물 굽어보듯 고려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아직은 아무도 끝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재석 /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저자

 

#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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