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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7) 3.유배와 망국, 이색의 장단음(長湍吟) ① 유배지에서 부른 아름다운 노래

입력 : 2019-10-28 05:39:10
수정 : 2019-11-18 06:29:28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7)

3.유배와 망국, 이색의 장단음(長湍吟)

 

 유배지에서 부른 아름다운 노래

 

푸른 병풍 가로 걸친 장단의 석벽 위에/ 비단을 펼친 듯 환하게 철쭉이 피었도다./ 장사꾼 배를 잠시 빌려 흐름 따라 내려가니/ 한 시절의 정경 모두 이름 붙이기 어렵도다.(이색. 장단석벽의 철쭉꽃을 구경하다.)”

 

▲ 이색이 유배된 장단 고랑포

임진강 노래한 시 가운데 대표적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시는 푸른 병풍’, ‘비단을 펼친 철쭉’, ‘말하기 어려운 정경을 나열하며 임진강을 찬미한다. 묘사의 적실성을 말하기 전에 작자가 대학자 목은 이색이란 점이 정경에 믿음을 준다. 시를 쓴 때가 실은 유배된 뒤의 어느 날이었다는 점은 더 각별하다. 시 어디에서도 추방된 자의 심정은 읽을 수 없다. 유배자의 눈에도 강산은 아름다웠다고 말해야 할까? 혹 비탄의 어조가 담겼다면 절경이 더 빛났을지도 모르겠다.

고려의 마지막을 이끌던 이색은 1389년 공양왕 즉위와 함께 정계에서 밀려난다. 신돈의 자식을 왕으로 세운 주모자라는 이유였다. 신돈의 자식은 공민왕을 이은 우왕과 창왕을 말한다. 납득하기 어려운 정치적 공격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왕조의 정통성에 논란이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은 컸다. 기존세력과 신진세력이 힘을 겨루던 고려 말의 정세는 이 과정을 통해 신진세력에게 주도권이 넘어간다.

이색 문하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이후 조선을 건국한 실력자 이성계도 친구나 같았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장단의 유배지로 떠나는 날 그를 배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덕산 아래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었다. 이색은 산사에 들어가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잠든다. 그리고 새벽 예불소리에 깨어 시 한 수를 짓고는 임진강변의 장단으로 들어간다. 개성에서 장단은 하루면 족한 거리다. 유배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깝다. 지리적인 거리보다는 심리적 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도성 안과 밖이라는 차이, 나아가 임진강 안팎의 차이는 더욱 큰 것이었다. 임진강은 고려 도성의 관문이었다. 이 강을 벗어난다는 것은 주류사회에서 배제됐다는 것을 뜻한다. 임진강은 서울의 입구인 동시에 퇴출의 경계였다.

이색은 여기서 4개월여를 머문다. 그 사이 이색은 정치에 뜻이 없음을 밝히며 고향으로 돌아가 살 수 있도록 조정에 청한다. 한편으론 체념을 담아 감악산 구름장단의 달빛이라면 고향이 아니어도 괜찮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 장단적벽의 철쭉 
 

이색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정은 이색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도, 장단을 고향으로 삼는 일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쪽 먼 경상도 함창 유배를 결정한다. 이색이 이 소식을 접한 것은 임진강을 유람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석벽에서 노닐고, 상류까지 오르내리며 즐기다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함창으로 부처한다는 느닷없는 소식이었다. 그를 전송하기 위해 부인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별을 위해 부인과 다시 석벽을 찾았다.

어떤 그림도 비교가 안 될 한 구역의 이 형승/ 나의 남은 흥취를 부인도 맛보게 하려 했는데/ 이웃 노인이 어쩌자고 이 즐거움을 방해하노./ 감흥이 모조리 사라져서 오두막으로 돌아왔소.(이색. 집사람을 데리고 석벽에서 노니는 중에 이웃집 박씨가 물을 건너다 말에서 떨어져 삿갓을 잃었다)”

부인과 마지막 흥취를 즐기려는데 그만 그 곁을 지나던 이웃 사람이 강물에 빠지는 일이 벌어진다. 소동 가운데서 이별의 정을 나눌 수 없었던 이색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다. 혼란스런 고려 말 정국에서 임진강 밖으로 유배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은 실감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고려와 함께, 그와 가족의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재석 /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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