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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5) 2.고향, 이제현의 개성팔경 ②  우리 감각을 수만리로 확장시킬 한 걸음

입력 : 2019-10-28 04:54:53
수정 : 2019-11-18 06:29:52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5)

2.고향, 이제현의 개성팔경  우리 감각을 수만리로 확장시킬 한 걸음

 

이제현이 고국을 그리며 떠올린 개성팔경은 어디일까? 시에는 전팔경, 후팔경 모두 열여섯 곳이 등장한다. 다만 세 곳이 겹쳐 있어 실제장소는 열세 곳이다. 전팔경은 칠언절구, 후팔경은 무산일단운 장단구로 지었다. 이제현의 익재집에 편차된 전후 순서에 따라 전후를 나누었지만 작시 시점은 전팔경보다 후팔경이 앞선다. 전팔경이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러 티벳을 향하던 1323년 작인데 반해 후팔경은 그 이전 중국여행 때의 작품이다.
 

전팔경은 곡령춘정, 용산추만, 자동심승, 청교송객, 웅천계음, 용야심춘, 남포연사, 서강월정의 여덟 곳이다. 후팔경은 자동심승, 청교송객, 북산연우, 서강풍설, 백악청운, 황교만조, 장단석벽, 박연폭포로 구성된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고려도성을 대표하는 곳일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고려의 중심부를 반영하는 상징공간이다.

곡령은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신라 말 최치원이 왕건에 보냈다는 편지에 계림황엽, 곡령청송이란 표현이 있다. 신라는 지는 낙엽이고 고려는 푸른 소나무라는 뜻이다.

용산은 용수산이다. 개성에서 용산은 서울의 남산 같은 곳이다. 도성의 남쪽에서 한강하구 조강과 연결되는 위치다. 개성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용수산은 도성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는 방향타 역할도 했다. 자동은 자하동인데 고려동 북쪽 송악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가을단풍이 붉은 노을 같아서 자하동이라고 했다. 자동심승은 자하동의 절집 안화사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유명한 최충의 문헌공도가 자하동에 있었다.

청교는 개성의 동쪽 교외, 도성의 동문 밖으로 길손들이 지나는 역이 있었다. 임진강 동파역, 청교역, 개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기약 없는 이별에 울고 다시 만난 기쁨에 또 눈물 흘리던 천수원이 여기 있었다. 그래서 청교를 눈물들이라고 불렀다. 웅천은 개성의 동남쪽으로 흐르는 시내다. 진봉산에서 흘러나와 청교역을 지나 사천으로 들어간다. 용야는 장단군 선적리 대세현의 용둔교 주변이고, 남포는 개풍의 죽배천 하류 조수가 드나드는 포구다.

서강은 예성강이다. 서해의 험한 바닷길을 지나온 배들이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 벽란도로 들어왔다. 고려가요 예성강곡의 현장이다. 이제현도 시에서 이 노래를 떠올렸다. 북산은 천마산이다. “오관산 서쪽 언저리와 구룡산(성거산) 동쪽이라는 구절에서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천마산에 머물렀던 이규보는 자신의 거소를 북산이라고 했다.

백악은 공민왕이 별궁을 지었다는 장단의 백학산이다. 백악은 풍수상 개성의 왼쪽을 보강해 주는 길지로 여겨졌다. 황교는 개성 서문 밖이다. 서문을 나오면 황교, 황교를 건너 나아가면 벽란도에 이른다. 장단석벽은 임진강의 절경이고 박연폭포는 달리 말할 필요가 없는 명승지다.

개성팔경은 명승지만 노래하지 않는다. 장소와 결합한 어떤 순간의 상승된 감정이 하나의 정경으로 표출된다. 중국 소상팔경에 기인한 팔경시들이 대체로 실경보다는 정감을 앞세운다. 고향이 꼭 빼어난 명승지여서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아니어서 일 것이다.

이제현이 만 리 밖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개성은 임진강에서 지척이다. 한 지식인에게 충만한 감성을 불러 일으켰던 그곳을 오늘은 눈앞에 두고도 찾아갈 수 없다. 휴전선 북쪽이기 때문이다. 개성으로 내딛는 한발은 우리의 공간 감각을 수만리 너머로 확장시킬 것이다. 팔경의 한 자락 장단석벽백악청운은 당장에 마주할 수 있는 남쪽에 있다. 이조차도 개성과의 관계 속에 놓이지 않는다면 온전한 것일 수 없다. 정작 개성사람들도 8경 중 2경은 마주할 수 없다.

새벽에 청교역을 지나/ 백악산으로 봄놀이 간다/ 제호조 술 권하여 지저귀니/ 한 번 듣고 한 번 웃는다(이제현. 송도팔경 중 백악청운)”

지은이는 지금 개성을 나와 청교역 지나 백악산으로 가고 있다. 휴전선을 넘어오는 길이다.

  이재석 /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저자

#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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