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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책꽂이] 여행의 이유

입력 : 2019-09-05 08:38:24
수정 : 0000-00-00 00:00:00

[신간 책꽂이] 여행의 이유 (김영하, 문학동네)

 

 

김영하 소설가는 신작 <여행의 이유>에서 호텔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세제와 방향제로 방금 전 머물렀던 투숙객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기에, ‘호텔에 들어설 땐 마치 새집에 들어 선 것 같은 설렘을 느낀다’(65)고 했습니다.

 

책을 읽어가던 호흡을 잠시 멈췄습니다. 독자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여행의 이유를 유려하게 설명하는 이십년 글쟁이의 문장에 매료됐지만, 호텔을 언급하는 대목에선 경험의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행지에서 호텔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주로 찾았습니다.

 

잠시 책장을 덮었습니다. 제 인생 최초의 여행이 생각났습니다. 19941, 재수를 마치고 재수종합반 학생들과 한겨울 지리산을 올랐습니다. 눈길을 헤치고 산장에서 잠을 자며 기어이 종주했습니다. 제 인생 진로에 대해 의견이 달랐던 아버지와 내리 석 달을 싸웠던 기억, 대입시험 전날 저녁에 가출했던 기억, 삼 일만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파라솔대로 맞았던 기억, 재수학원을 다니며 죄수처럼 공부했던 기억 등등 열아홉 살 가슴에 돌처럼 내려앉았던 기억들이 신기하게도 바람으로 변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날 이후 이십대와 삼십대를 거치며 일상의 허물들이 가슴팍에 켜켜이 쌓여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때면, 마치 빨래를 하듯 지리산을 찾았습니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65)

 

김영하 소설가가 여행지 호텔에서 삶을 리셋했다면, 저는 지리산 산장에서 삶을 리셋해 왔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가서야 김영하 작가의 흐름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상을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분명 일상으로 돌아올 힘을 얻기 위해서 일겁니다. 김영하 작가는 지금껏 스무 권의 책을 냈지만 대부분 여행지에서 돌아와서 책을 쓸 수 있었답니다. 여행지에서 철저히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가 되었을 때, 일상으로 돌아와 어떤 사람’(somebody)으로 살아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2019년도 벌써 절반이 지났습니다. 더 늦기 전에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유형선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저자)

 

 #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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