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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고딩의 같잖은 문화리뷰 <37>  난민인권단체방문기4 록빠 <사직동, 그 가게>2 

입력 : 2019-09-07 04:09:52
수정 : 2019-09-07 04:17:26

흔한 고딩의 같잖은 문화리뷰 <37> 

난민인권단체방문기4 록빠 <사직동, 그 가게>2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티베트 땅을 탈출해 다람살라에 와도 오래 살지 못했다.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5년 이상 사는 사람이 100명 중 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아마 아데는 그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다람살라로 왔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고문한 이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 역시 중국에 대해 화가 아닌 포용을 말했다.

 

종교란 무엇이길래 사람을 이토록 평화롭고 강인하게 만드는 걸까.

독실한 기독교인 친구는 나에게 없는 독특한 단단함을 가지고 있었다. 종종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라 깎아내리곤 하는데, 그 친구나 티베트 사람들을 보면 종교를 통해서 강인해지는 것 역시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걸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멋지다.

 

 

티베트 상황에 겹쳐서 한국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잠양씨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였던 1950, 티베트에는 침공이 있었다. 인구의 1/6이 죽어가는 학살 행각에 티베트는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다. 열심히 외웠던 625전쟁 과정 중 유엔군 참전은 무척 중요하게 다뤄졌다. 625 전쟁이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전쟁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만큼 큰 힘을 가진 조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티베트의 도움요청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한국이 전쟁을 치루고 유엔의 도움을 받는 동안 티베트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나라를 뺏겼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에 책임을 지는 게 싫었다. 고등학교를 그만 둔 것도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퇴에는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은 내 의무도 책임도 아니라 생각했다. 이런 재미없는 생활을 알았다면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았을 텐데. 내 책임이라고 하기엔 내게 고등학교에 대해 제대로 알려준 이가 아무도 없었다.

반대로 내가 선택한 부분에 대해서 책임지려 했다. 내가 선택한 새로운 학교에도, 내가 선택한 프로젝트에도, 모두 성실하게 임했다. 그렇게 살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배우면 배울수록 나에겐 직접적이지 않은 책임이 많았다.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에 어떻게든 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학살에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에서도, 나는 책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책임은 나를 힘들게 만들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배경이 조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티베트에게도 그런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아는 티베트는 히말라야와 불교, 평화로운 풍경들뿐이었는데. 힘든 시기를 같이 보냈음에도 내가 사는 한국은 도움을 받았고 티베트는 그러지 못했다. 책임감, 부채감, 어떤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 들어도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알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뒷걸음질치고 싶지는 않았다.

 

 

가게를 나서기 전, 잠양씨는 스티커를 줬다. 티베트 국기가 삐뚤빼뚤하게 그려진 스티커였다. 설산과 국민을 뜻하는 사자 두 마리, 티베트 불교만의 해가 확장되고 있는 그림은 8살짜리 티베트 아이가 그린 것이었다.

다람살라로 오기까지 티베트 사람들이 얼마나 험한 길을 거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영화 <히말라야> 속 황정민의 절절한 연기만이 떠올랐다. 작위적인 영상을 뒤집을 다큐멘터리 한 편을 봤다. <브링 홈, 아버지의 땅>, 티베트에서 인도 다람살라로 흙을 옮겨가는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티베트 난민 2세이자 예술가인 주인공 텐진 릭돌은 티베트를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며 다람살라의 티베트인들에게 티베트 땅을 선물하려 했다. 흙을 옮겨가는 일이 그렇게 힘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영화 속의 위험천만한 상황들이 너무 낯설고 무서웠다.

중국 경찰들은 티베트에서 위협적인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국경의 경비는 무척 살벌했다. 국경을 넘기 위해서 불법적인 경로가 필수적인데, 불법 브로커들이 믿을만한 사람인지도 확신할 수도 없었다. 영화는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치지만 그 험난한 여정을 되새기며 티베트 사람들이 다람살라로 오기 위해 겪는 일들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를 했다. 그 사람들이 모두 티베트의 흙처럼 무사히 다람살라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
 

 

 

종종 어른들 없이 아이들끼리만 해발 4천 미터 높이의 히말라야를 넘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다람살라에 도착해서는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있다. 록빠에서는 그런 아이들 대상으로 미술치료를 진행하는데, 하루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시간이었다. 아이는 서툴게 티베트 국기를 그렸어. 다람살라에 도착해 티베트 국기를 본 순간, 자신의 나라에도 국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던 그 순간이 아이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두부를 넣은 카레는 맛있었고 홀린 듯이 구매한 손바닥만 한 노트도 마음에 들었지만, 사직동에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잠양씨는 장미밭과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장미만 있으면 정원이 아니에요. 정원에 꽃이 하나뿐이더라도, 다양한 생물들이 자라고 있다면 그걸 우리는 정원이라 부르죠.” ‘사직동, 그 가게는 종로 사직동의 아스팔트길을 정원의 야트막한 길로 만들었다. 어두워진 서울의 길을 내려오는 내 배와 가방 그리고 머릿속에는 티베트가 가득했다.


               조 은 ([파주에서] teen 청소년기자)

#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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