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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07] 부자의 역사

입력 : 2019-10-28 06:10:18
수정 : 2019-11-18 06:58:52

  이해와 오해 [107]

부자의 역사

박종일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세계 각지에서 방대한 개인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냈다. 이전 시대라면 이처럼 큰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람은 군사와 정치적 통치자, 극소수의 귀족 상인뿐이었다. 19세기말,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는 유럽의 귀족들이었다. 영국과 러시아 귀족이 선두에 섰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로이센의 귀족들이 근소한 차이로 그 뒤에 섰다. 프랑스 귀족들은 1789~1794년 대혁명의 충격을 받은 뒤로 다시는 지난날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런 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자면 가장 좋은 방법은 농촌의 토지자산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사업-은행, 광산 채굴, 도시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은행업, 제조업에서 많은 신흥 부자가 쏟아져 나왔다.

 

록펠러 가문 

1865년 미국 내전이 종결되었다. 남북이 통합되면서 시장규모가 두 배로 커졌다. 미국 경제는 고성장기에 진입했고 미국의 기업은 전례 없는 자본축적의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1860년 무렵 인구의 10%가 국가 전체 부의 절반을 차지했으나 1900년에는 2/3를 차지했고, 상위 1%의 집안이 소유한 부가 국가 전체 부의 40%였다. 대략 1900~1914년 사이에 미국의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는 유사 이래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때때로 무제한의 자본축적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미국 정치에서 이 문제를 두고 깊이 있는 논쟁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오히려 미국에는 초부자(super rich)가 등장하여 세계의 패자로 발돋움하려던 미국의 상징이 되었다. 애스터집안(Astors), 벤더빌트집안(Vandervilts), 듀크집안(Dukes), 록펠러집안(Rockefellers), 구겐하임집안(Gugenheims)의 꿈같은 부는 유럽의 부자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유럽 귀족의 저택을 모방한 건물을 가득 채운 값을 알 수 없는 구세계의 예술작품은 미국이 만들어낸 새로운 초월적 부의 전시장이었다. 초부자들이 통 크게 내놓은 기부금으로 세운 대학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고등교육 기관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일류 자산가, 또는 심지어 이류 자산가라도 유럽의 상층 귀족 가문과 쉽게 혼사를 맺을 수 있었다. 예컨대, (현재 가치로 환산하여) 140억 달러 재산의 상속 지분을 갖고 있던 콘수엘로 벤더빌트(Consuelo Vandervilt, 1877 1964)는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한 영국의 9대 말보로 공작(Duke of Marlborough)에게 시집가서 유럽 최대의 귀족 저택인 블레님궁(Blenheim Palace)의 안주인이 되었다. 신대륙과 구대륙의 돈과 명예를 교환하는 결혼식이 이 시대에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1세대 창업자의 뒤를 이어 20세기가 시작 될 무렵 등장한 초부자의 자식들은 재산을 흩뿌리는 것으로 인생의 낙을 삼았다. 이들 사치스런 소비세계의 지도자들의 행태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연구한 고전적 저작이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1899)이며, 마크 트웨인(Mark Twain)과 그의 친구 찰스 워너(Charles Dudley Warner)가 소설 형식으로 묘사한 작품이 도금된 시대(The Gilded Age)(1873)이다. 미국에서도 혈통은 결코 의미 없는 요소가 아니었다. 미국 사회의 엘리트는 찰스턴, 필라델피아, 보스턴, 뉴욕에 살며 식민지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집안의 후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아 자기 세대에서 증식시킨 사람들이었다. 대중은 이들을 귀족이라 불렀다. 물론 미국 헌법은 귀족을 인정하지 않지만 미국의 귀족은 대를 이어 유지되는 존귀한 권위와 고상한 생활방식의 상징으로서 유럽의 최상급 귀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20세기 초의 뉴욕에는 이런 미국 귀족이 대략 400명 정도 있었다. 이들은 곳곳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신분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미국의 부호들이 석유, 철도, 강철업에서 끌어 모은 부는 유럽의 산업화시대에 가장 부유했던 면방업계 거두들이 보유했던 자산 규모보다 몇 배나 많았다. 사실 영국의 산업혁명의 선구자들 가운데서 정말 부자가 된 사람은 극소수였다. 초부자를 얕보는 극초부자(mega-rich)가 있었다. 1914, 은행가 모건(John P. Morgan)이 당시 가치로 6,800만 달러의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는 그를 두고 부자축에 끼일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평했다. 그때 카네기, 록펠러(John D. Rockefeller), 포드(Henry Ford), 멜론(Andrew W. Mellon) 같은 기업가의 자산은 5억 달러 이상이었다.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부자는 유럽 최고의 부자(영국의 귀족이었다)보다 20배나 많은 자산을 보유했다. 로스차일드 집안(Rothschilds)(금융업), 크루프집안(Krupps)(강철, 기계, 무기), 베이트집안(Beits)(영국/남아프리카의 금/다이어몬드 자본)도 미국의 부호와 겨룰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극초부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내수시장 규모, 자연자원, 법과 제도 등 복합적이긴 하지만 산업 구조 자체의 상승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예컨대, 석유재벌인 록펠러가 입신할 수 있었던 진정한 계기는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열어준 백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기회였다.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아시아의 부자 가운데서 입신의 역사가 두 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부자는 없었다. 만주족이 청 왕조를 세운 1644년 이전에 중국에는 토지를 소유한 세습 귀족이 없었다. 엘리트 신분을 획득하는 경로는 부가 아니라 교육이었다. 관직을 통해 생계를 도모하는 사람은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까지는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거부가 되기는 어려웠고 몇 대에 걸쳐 부를 전승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 중국에서도 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자의 사회적 이미지와 지위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지 않은 관료 사대부 아래였다. 근현대에 들어와 진정한 중국인 부자는 동남아의 화교 가운데서 나왔다. 18세기에 중국에서 이주해온 쿠(Khouw, )씨 집안은 20세기 초 인도네시아에서 최대의 지주였다. 이 집안은 도시의 가장 요지에 자리 잡은 저택에서 제왕과 같은 생활을 누렸다. 중국인은 일반적으로 부유함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관부의 주목을 받게 되면 불필요한 골칫거리만 생기기 때문이었다. 쿠씨 일가가 살던 거대한 저택은 중국 본토에서는 같은 사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부자, 초부자, 극초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구조가 바뀔 때 나왔다. 어떤 사람은 지금이 그런 시대라고 한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부자가 나올 수 있을까? 나온다면 그들, 또는 그는 고상함과 책임감으로 시대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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