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대 칼럼> 홍세화의 충만한 삶 - 소유보다는 관계, 성장보다는 성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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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 칼럼>
홍세화의 충만한 삶 - 소유보다는 관계, 성장보다는 성숙을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봄꽃들이 앞다투어 피었다 지는 와중에 그가 떠났다. 4.19 혁명 64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4월18일 홍세화 선생이 눈을 감았다. 많은 이들이 이 땅에서의 그의 삶과 흔적을 기리며 그의 떠남을 슬퍼하였다. 장례식 기간에, 그리고 그 후에도 그를 추도하는 많은 글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그 글들을 읽으며, 그리고 생전 고인과 이런저런 소소한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새삼 그의 충만했던 삶이 부러워진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는 영광보다는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지만 한 순간도 의미없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마치 리영희 선생이 만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하셨던 말처럼, "한 순간도 꾹꾹 눌러 담으면서" 자신의 삶을 살다 갔다.
그가 세상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던진 화두가 있다. "소유보다는 관계, 성장보다는 성숙"을 우리 사회가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난해 1월, 절필을 선언하며 한겨레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서이다.
그는 이 글에서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산다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원들을 위한 교육에 초대받아 갔던 그는, 막상 그를 맞이한 조합간부들이 그를 앞에 둔 채 주식투자 얘기에 열을 올려 그를 당황하게 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이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진보도 물신의 노예가 되기는 마찬가지다.
"청빈하다"는 말은 뭔가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 되었다. 별다른 생업이 없던 정치인이 몇번의 국회의원 생활 후 수십억 재산을 갖게 돼도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한다. 오히려 수십년 국회의원을 하고도 전세집을 전전하는 정치인을 무능하다고 한다. 진보정치인입네 하는 이들이 앞다투어 코인이니 가상자산이니 하는 투기에 몰려들어도 잠깐 여론이 시끄러울 뿐 그의 재선에는 지장이 없다. 돈을 버는 일은 "능력" 문제일 뿐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약자 부조"라든가 "약자와의 연대"라는 것은 하품 나오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기득권 동맹"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지난 총선에서 나타난 "야권의 압승"이란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소유보다는 관계"라는 말보다는 "소유보다 연대(Solidarity)"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여러분들의 아파트 값을 올려드리겠다"는 것을 선거공약이랍시고 내논 어떤 국민의 힘 후보가 낙마하는 이면에 "내 아파트값 올라가면 내 자식들 집 장만은 어떻게 하나" 하는 상식의 연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치가 이제 더 이상은 공동체적 가치와 연대를 말하지 않고 더 많은 소유와 탐욕만을 조장한다면 이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성장의 신화"도 이제는 "아재 개그"의 한 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배가 곯아도 "올해 우리나라 GDP 몇%가 성장했다"는 소식에 뿌듯해 하던 개발독재 시대의 습관은 참 끈질기다. "목욕탕 물이 가득 차야 넘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의 눈속임도 진즉 약발이 떨어지지 않았나?
그리고 과연 성장의 끝은 어디인 것인가? 국민소득 100불의 저개발국가에서 35,000불의 "선진국"이 되어서도 여전히 우리가 타고 있는 사다리 윗칸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들 뒤를 좇아야 하는 것일까? 노인 자살율 1위, 세계 최저 출생율 등의 기록을 훈장처럼 달고?
경쟁과 성장만을 외치며 살아온 한국사회가 잃은 것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경쟁 상대로서가 아니라 이 시대를 같이 사는 동반자로서의 이웃, 인간에 대한 예의 말이다.
인간과 이웃에 대한 예의를 그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던 그가 갔다.
"나 하나만을 고집하면 주변 전체가 적이 되지만 나 하나를 양보하면 주변 전체가 이웃이 된다"
홍세화 선생이 전파하고자 했던 똘레랑스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사람좋은 그의 미소가 벌써 그리워진다.
정범구 위원은 전 독일대사입니다.
출처 : 인권연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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